지역문화

민관협력에 의한 청주3.1공원 재정비사업-정책형성 성공사례

송재봉 2011. 6. 12. 18:02

송재봉 충북참여연대 사무처장

1. 청주 3.1공원 조성과 강제 철거

청주 3.1 공원에 건립되었던 친일인사 정춘수의 동상이 1993년 시민단체에 의해강제 철거되는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10년 3월 1일 충북지역 3.1독립운동의 새로운 역사공원으로 재탄생하였다.

 

청주 3.1공원은 1980년 8월 15일 충청북도(지사 김종호)가 주체가 되어 계획과 예산을 수립하고 청주시가 그 지침에 따라 시공을 하였으며, 건립주체는 민간인을 위원장으로하는 민간추진위원회와 부지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실무추진위원회 및 도 문화재과장이 간사로 참여했으며, 건립대상자, 공적문안, 동상모형, 공원위치 등 건립을 위한 모든 사항은 도에서 지시하고 시에서는 시공만하는 형식이었다. 형식상 민간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건립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모두 충청북도가 결정하였다고 한다. 당시 동상제작과 조경 및 토목공사에 9천9백50만원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3.1공원 조성 당시 공무원과 유족대표 중심으로 사업이 계획되면서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학자나 독립운동 관련단체, 시민단체의 참여는 부족하였다. 당시 3.1공원 조성 취지문을 보면 ‘우리는 민족대표의 숭고한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의 정통성을 수호하고 새로운 민족사를 창조해 나가기 위하여 우리고장 출신 여섯분의 동상을 이곳에 모셨다’고 하였다. 그러나 건립과정을 살펴보면 충북지역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고증과 의미 규정, 민족대표 33인중 충북인사 6인의 행적에 대한 검증과정의 부족, 3.1공원 조성에 대한 시민적인 공감대 형성이 부재한 가운데 이름은 3,1공원이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민족대표 6인을 기념하는 공원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어 있었다.

 

특히 심각한 문제는 건립당시부터 정춘수에 대한 친일문제가 논란이 되었으나, 그가 민족대표 중 한명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동상건립을 강행하였다는 점이다. 이처럼 충분한 사전 검토 미비와 역사의식 빈약함은 이후 3.1공원의 위상을 스스로 추락시키고 지역사회내의 새로운 갈등구조를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다. 민족대표였지만 이후 친일인사로 돌변한 인물의 동상을 건립하여 지역주민과 학생들의 가치관에 혼란을 주고 함께 건립된 다른 독립운동가의 명예까지 실추시키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3.1운동을 6명의 민족대표만 한 것이 아닌데 이들의 동상만 세워놓고 3.1공원이라 하는 것은 당시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선 수많은 민중의 정의로운 희생을 무시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처럼 3.1공원내 정춘수 동상은 건립이후 부터 지속적인 논란거리가 되어오다. 동상이 건립된지 13년이 지난 1993년 충북지역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가 친일잔재 청산 차원에서 정춘수 동상 철거를 문제를 공식화 하였다. 이후 수차에 걸친 공청회와 방송토론회, 3.1공원에서 철거를 추진하는 시민단체와 이를 저지하는 청주시와 경찰과의 마찰이 반복되면서 광복50년을 맞이한 1995년에는 지역사회 최대의 현안이슈로 등장하였다. 결국 철거를 주장하는 시민단체와 청주시 및 충청북도와의 원만한 합의에 기초한 문제해결에 실패하면서 1995년 2월 20일에는 정춘수 동상에 일장기가 둘려졌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96년 2월 8일 오후 2시 시민단체 회원들에 의해 정춘수 동상은 강제로 끌어내려 졌다.

2. 동상강제철거 이후 대안 모색기

 

동상철거 이후 11년 동안 3.1공원에는 철거된 정춘수 동상의 좌대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상태로 방치되면서 동상 좌대까지 완전 철거하자는 주장에서 부터 좌대도 역사적인 기념물이고 교육적 가치가 있다는 차원에서 보존해야 한다. 정춘수 좌대위에 그의 독립운동과 친일행적을 동시에 기록한 비석을 세워야 한다. 등등 갖가지 주장과 의견이 제기되는 등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논의는 없고 논란만 확산되고 있었다. 이 당시 지역언론은 매년 3.1절이 되면 반복적으로 좌대만 있는 3.1공원의 모습과 창고에 방치된 동상의 몸체를 가시화 했으면, 바람직한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청주시는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였으며, 좌대 앞에 일부 시민단체가 친일행적을 문제 삼아 동상을 철거하였다는 푯말만 설치한 채 방치하고 있었다.

 

오른쪽에 비어 있는 좌대가 친일파 정춘수의 동상이 있던 곳으로 10여년간 방치되어 왔다.

3. 3.1공원 재정비 추진 방안 모색

 

1) 3.1공원의 정책적 문제

 

3.1공원은 민족대표 33인 중 6인의 자주독립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조성되었으나 정춘수의 친일전력이 문제기 되어 하나의 동상이 철거되면서 그 의미를 상실하였으며, 동상이 철거된 좌대만 존재하는 상황이 10년이 넘게 지속되면서 3.1공원에 있는 다른 5명의 민족대표까지 명예를 훼손한다는 지적이 지속되는 등 동상을 철거한 시민단체와 청주시 모두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3.1공원의 정춘수 동상 좌대 문제를 포함 3.1공원을 정비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복회충북지부와 33유족회는 당시 남상우 청주시장을 방문하여 정춘수 동상 좌대위에 비석을 세우고 여기에다 정춘수 목사의 독립운동 전력과 친일전력을 함께 기록하여 후대들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 제안을 하였다. 그리고 이 제안에 대해 당시 청주시장은 사회적 논란이 큰 문제인 만큼 시민단체와 협의를 통해 단일안을 만들어 오면 적극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이에 2007년 8월 30일 광복회 충북지부와 33유족회는 시민단체와 협의하여 이들 단체가 주관하는 청주3.1공원 정춘수 동상 좌대 철거관련 토론회가 열리면서 이 논의가 다시 본격화되었다. 당시 토론회는 이후 보훈단체와 시민단체 및 관련전문가들이 함께 모여 3.1공원 정춘수 동상 좌대 처리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기구 구성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2007년 12월 6일 정춘수 좌대 철거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시민단체와 보훈단체 간담회에서는 정춘수 좌대를 철거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관점에서 3.1공원 문제를 접근할 것이 아니라 3.1공원이 진정 충북의 3.1운동을 상징하고 후대에게 역사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는 근본적인 개선방안을 모색하자는 취지하에 3.1공원정비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즉 3.1공원재정비추지위원회의 발족취지는 ‘청주 3.1공원을 충북지역3.1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민족정기를 되살리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만들기 위해 정춘수동상 좌대를 포함한 정비방안을 마련하고자 한다. 따라서 공원 정비는 민족대표 5인의 위상을 훼손하거나 정춘수 목사의 친일행적에 면죄부를 주자는 의미가 아니며, 역사적 사실을 올바로 기록하고 현재 좌대만 남은 채 10여년간 방치되어온 3.1공원을 재정비하여 그 역사적 위상을 재정립함을 목적으로 한다.’였다.

 

 

 

2) 3.1공원 재정비 방향 수립을 위한 대안모색

 

이후 3.1공원정비추진위원회는 충북참여연대, 충북민주화운동계승상업회 등 시민단체 관계자, 광복회등 보훈단체 대표, 정춘수 동상 철거에 참여했던 인사 등이 참여하는 재정비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2월 19일 첫 실무위원회 이후 2008년 2월 27일 충북지역 3.1운동과 3.1공원 재정비 방안 모색토론회 등 수차에 걸친 회의와 현장방문, 청주시와의 협의 등을 통해 3.1공원의 정춘수 좌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충북의 3.1운동을 상징하는 횃불 조형물 설치, 동상 뒤편으로 충북 각 지역의 3.1운동 모습을 형상화한 부조벽화, 동상 좌대 높이를 낮추어 시민과 친근한 이미지를 부여하는 등 전반적인 재정비 방안을 확정하고 2008년 4월 11일 청주시에 사업추진을 공식 건의하였다.

 

추진경과 및 청주시에 제안한 세부사업계획

 

3.1공원재정비추진위원회 활동 경과

 

○ 취지 및 목적

청주 3.1공원을 충북지역3.1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민족정기를 되살리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만들기 위해 정춘수동상 좌대를 포함한 정비방안을 마련하고자 한다. 따라서 공원 정비는 민족대표 5인의 위상을 훼손하거나 정춘수 목사의 친일행적에 면죄부를 주자는 의미가 아니며, 역사적 사실을 올바로 기록하고 현재 좌대만 남은 채 10여년간 방치되어온 3.1공원을 재정비하여 그 역사적 위상을 재정립함을 목적으로 한다.

 

○ 추진경과

2007년

- 8월 30일 |청주3.1공원정춘수 동상 좌대철거관련 토론회 개최 / 33유족회, 광복회충북지부 주관 청주예술의전당 대회의실

- 12월 6일 |정춘수 동상 좌대 철거 및 3.1공원 재정비를 위한 시민단체 보훈단체 대표자 간담회 / 3.1공원재정비추진위원회 결성

- 12월19일 |삼일공원내재정비추진위원회 제1차 실무기획위원회 회의 및 3.1공원 현지답사 / 참여연대 동범실

- 12월26일 |3.1공원 재정비 기본계획 마련을 위한 모형도 초안의뢰

2008년

- 01월16일 |3.1공원 재정비추진위원회 2차회의 개최 / 정춘수 목사의 동상좌대를 철거하고 지역3.1운동을 상징할 수 있는 조형물을 건립하고, 정춘수 목사의 친일행적과 동상철거과정 등은 3,1공원 중수기에 기록으로 남기는 방안을 모색하며, 3.1공원 재정비을 포함 충북의 3.1운동을 정리하는 학술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함.

- 02월18일 |3.1공원재정비추진위 3차회의 개최 충북참여연대 동범실/ 공원 재정비 구상도 검토 및 보완 요구, 토론회 계획 검토 및 토론자 섭외 등 협의

- 02월27일 |충북지역의 3.1운동과 3.1공원 재정비 방안 모색 토론회 개최 / 청주시의회특별위원회실

- 03월10일 |3.1공원재정비추진위원회 4차회의 개최 / 충북참여연대 동범실 / 기본방향 및 계획 확정

- 04월11일 | 남상우 청주시장 방문 및 재정비사업 제안설명 및 사업방향관련 논의 / 기본방향과 사업추진 일정에 대한 공유 및 세부 정비 방안 즉 정춘수 좌대 철거 문제 등에 대한 의견 교환 및 추가적인 의견 수렴 필요성 공유

 

○ 3.1공원 역사공원화 사업 기본방향

 

1. 충북지역 3.1 민족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과 가치를 올바로 정립할 수 있도록 3.1공원을 민족대표 5인에 당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우다 희생당한 수많은 민중들의 정신을 담는 방향으로 재정비하여 3.1공원의 역사적 위상 강화

2. 시민·사회단체의 철거로 좌대만 남아있는 정춘수 목사 동상의 좌대 철거를 포함 공원의 역사성과 상징성, 교육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 재정비 방안 마련

3. 3.1공원이라는 명칭과 위상에 걸맞은 민족의 역사공원으로 재정비하여 시민의 자긍심 고취와 후대들의 민족교육 체험의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는 방안모색.

 

○ 3.1공원 재정비 계획

 

1. 충북지역민의 3.1운동을 상징하는 군상형태 조형물 신설

 

- 현 3.1공원은 충북의 민족대표 동상만으로 구성되어 3․1운동이 직업․성별․연령․종교․학력․지역 등의 조건을 초월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이었다는 상징성과 대표성을 나타내는데 한계를 보임. 따라서 민중과 관련된 조형물의 신설이 필요함.

- 현재(2007. 12)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 374중 3․1운동 관련 유공자가 151명으로 40%에 달한다. 따라서 새로 조성되는 조형물에는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최소한 3․1운동 유공자)의 이름을 새겨두는 공간을 마련하면 더욱 바람직할 것임.

- 만일 새로 조성될 조형물에 공간이 마땅치 않다면 현재 동상 뒤에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조형물에 새겨 넣거나 도로변의 담장을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후손들이 수시로 찾아 3․1공원의 활용도도 높일 수 있을 것임.

 

2. 정춘수 동상 좌대의 철거와 충북지역 3.1운동사 기록 조형물 건립

 

- 동상 좌대 철거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찬반양론이 있는 만큼 철거할 경우 충분한 여론수렴과 설득의 과정을 가쳐야 할 것임.

- 재정비추진위원회는 잠정적으로 현재 동상은 철거되고 좌대만 남아있는데 이 좌대를 철거하고 그 자리와 주변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상징 조형물을 건립하자는 입장임. 즉 3.1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충북지역 3.1운동에 대한 기록을 보완하고자 함.

- 이곳에는 충북지역 3.1운동의 전개과정과 특성 등을 담는 것과 함께 3.1공원을 재정비하기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여 지역민에게 준엄한 역사교육의 장으로 기능하도록 함.

3. 동상주변 정비사업 병행

 

- 3.1공원 주변의 일부 조경과 담장을 철거하여 주변 공간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보고자 함.

- 민족대표 동상 앞 쪽에 독립선언서와 재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형물은 공원의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설치하고

- 동상앞쪽 계단으로 인해 나뉘어져 있는 공간은 계단을 없애고 하나의 공간으로 합쳐 공간이용의 효율성을 높이며

- 대규모 행사 개최가 어려운 협소한 공간을 우암산 등산로 입구 주차장에서 3.1공원, 3.1공원 밑 족구장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자 함

4. 3.1공원의 활용도 제고

 

- 3․1공원은 우암산 기슭 시민의 발길이 잦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비교적 양호한 입지조건을 지니고 있으나 역사공원으로서의 활용도는 매우 미약하다.

- 3․1공원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관청이 솔선하여야 한다. 예컨대 지자체의 3․1절 기념식을 행사 개최로 3.1공원을 시민과 언론의 주목을 받게 해야 함.

- 걷기대회나 마라톤대회 등의 출발과 종착지를 이곳으로 설정하고, 야외 공연이 이곳에서 진행될 수 있도록 지원

- 현장에는 안내원이 상주하여야 한다. 유적지를 관람할 시 설명을 듣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효과상 큰 차이가 있다. 안내원은 문화 해설사 또는 자원봉사자를 배치해야 한다.

- 관람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관람효과를 증대시키기 위해 충북지방 3․1운동의 개요와 특징, 민족대표의 활동상들을 간략히 정리한 안내책자 등을 제작하여 비치하고 관람객에게 배부.

 

○ 사업일정 및 예산(안)

 

1. 사업일정

1) 전문기관의 지원을 받아 2008년 3월까지 기본계획과 조감도 초안을 만들어 추진위원회 최종안을 확정하고.

2) 2008년 3월중 기본계획안과 사업추진 제안서를 청주시에 제출.

3) 청주시가 시의회 등과 협의하여 최종 계획을 확정하고 2008년과 2009년 사업예산에 반영되도록 함.

4) 사업종료는 가능한 2009년 3.1절 90주년에 맞추도록 노력 함.

 

2. 예산안

1) 정비계획과 방법에 따라 예산은 편차가 크게 날 것으로 예상됨

2) 다만 이상에서 제안하고 있는 조형물과 정비안을 기초로 예상해 보면 약 3억원 내외의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 됨

3) 항목별 재정비 예산(안)

- 좌대 철거 및 지역3.1운동 기록 조형물 : 40,000,000원

- 동상 배경으로 구상한 태극기 조형물 : 60,000,000원

- 지역민의 3.1운동 군상 조형물 : 100,000,000원

- 주변 정비 : 100,000,000원 (동상 앞쪽 2단 층계로 분리되어 있는 공원 바닥을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 3.1공원 양쪽에 조경석으로 분리된 공간 통합 공사) :

 

○ 조직구성

1. 지역 시민단체와 광복회, 3.3유족회 등의 함께 참여하는 의미를 살려 2인의 공동대표 선임

2. 양측에서 각 5인의 추진위원과 각 분야 전문가 등을 포함 15인 내외의 재정비추진위원회 구성

- 위원명단 :

오상근 광복회 충북지부장,

김백호 광복회 충북지부 사무국장,

신현억 광복회 제2광복 새정신운동 특위 기획위원,

이현기 (사) 민족대표33인 유족회 회장,

홍래준 민족대표 33유족회 회원

고용길 청주시의회 의원

박걸순 충북대 역사과 교수

도종환 시인,

강태재 충북참여자치연대 공동대표,

신동명 마을공동체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이정호 충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사무국장,

- 공동위원장 : 강태재 충북참여자치연대 공동대표

오상근 광복회충북지부장

- 간 사 : 송재봉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

 

4. 실행기구

1) 문안소위원회 구성

- 역할 : 3.1공원을 지역 3.1운동 역사공원으로 재정립할 수 있는 문안을 작성하는 역할을 하며

- 위원 : 허원 교수와 박걸순 박사, 도종환 시인.

2) 실무기획위원회 구성

- 역할 : 전체적인 사업 기본구상, 재정비 계획수립, 예산 등 에 대한 기본 계획 수립과 본 사업의 업무추진을 위해 4인의 실무기획위원을 두기로 함.

- 위원 : 김백호 광복회 사무국장,

신동명 마을공동체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이정호 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사무국장,

송재봉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

 

 

4. 3.1공원 재정비 기본계획의 결정과 민관협력

 

정책형성(policy formulation)은 어떤 문제의 해결 또는 목적 달성을 위해 여러 개의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정책결정 과정이라고 할 때 청주 3.1공원의 정춘수 동상 철거 이후 좌대를 포함한 3.1공원 재정비 사업은 첫째, 정춘수 동상을 재건립하는 방안, 둘째, 기존처럼 좌대를 그대로 두고 별도로 정춘수 목사의 친일행적과 철거 이유를 기록하는 방안, 셋째, 죄대위에 비석을 설치하고 정춘수의 독립운동과 친일행적을 함께 기록하는 방안, 넷째, 좌대를 철거하는 것과 함께 3.1공원을 충북의 민족대표 6인을 기념하는 공원이 아닌 충북의 3.1운동을 기념하는 공원으로 전면 재정비하는 방안 중 하나의 대안을 선택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정책문제를 제안하고 주도한 집단은 광복회와 33유족회 등 독립운동 유공단체, 2006년 정춘수 동상을 철거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인사들, 청주시의회 의장 등 의원, 청주보훈지청, 청주시장과 문화관광과, 사회복지과 등 행정분야, 충북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지역언론 등 이었으며, 이들의 의견은 공청회, 토론회, 간담회, 언론기고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었으며, 이를 수렴하고 다양한 의견의 장단점을 분석하여 최적의 대안을 마련하는 역할은 3.1공원재정비추진위원회가 담당하였다. 다양한 대안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견이 존재한다는 것의 반증이며, 하나의 대안을 선택한다는 것이 지난한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북참여연대와 광복회는 1995년에 시작하여 1997년에 결실을 본 한봉수의병장 동상건립 사업을 함께 추진하였던 경험과 신뢰를 바탕으로 각자의 의견을 조율할 수 있었으며, 청주시가 논의를 주도하지 않고 중요한 논의 과정에 참여하면서도 3.1공원재정비추진위원회의 의견을 존중하는 노력을 보인 것이 3.1공원을 네 번째 대안인 충북의 3.1운동을 상징하는 역사공원으로 재정비하는 안으로 결정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청주시와 3.1공원제정비추진위원회는 이상의 사업제안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관련부서와의 일상적인 의견교환을 통해 정비계획의 방향과 사업내용에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즉 3.1공원 재정비사업은 이념적 정서적으로 대립되고 있던 다양한 단체간 3.1공원을 역사공원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하에 원만한 합의과정을 만들어 낸 것과, 시민단체와 많은 분야에서 대립적인 관계에 있던 청주시와 3.1공원재정비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상대의 의견과 주장을 수용하면서 공동의 합의를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고 또 의미있는 일이 되었다. 특히 추진위원회와 청주시청 실무진과의 긴밀한 협의를 기초로 사업제안을 하였으며, 청주시는 이러한 민간영역의 합의에 기초한 사업제안을 적극 수용하면서, 이루 본격적인 사업추진과정의 매 단계마다 협의회를 개최하여 추진위원회의 의견을 수렴하고, 많은 결정권을 추진위원회에 위임하는 자세를 보임으로서 상호 갈등적인 관계에 있던 각 주체들이 함께 참여하여 기존의 소극적인 좌대 철거 또는 비석설치와 같은 형식적인 사업내용을 대폭 보완하고 개선한 3.1공원을 진정한 충북지역을 대표하는 역사공원으로 재 조성하자는 정책결정을 실현 할 수 있었다.

 

이후 청주시 사회복지과는 3.1공원 재정비 공사 기본계획 용역 발주 이전에 추진위원회 의견수렴, 실시설계업체 선정 이후 업체와 추진위원회와의 간담회를 통해 3.1공원 재정비 방향과 취지에 대한 인식 공유, 중간평가 및 보고회, 최종보고회, 조형물 제작과정 참관 및 의견제시 등 재정비 사업 전 과정에 민간 추진위원회와 사업내용과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사업추진과정에서 나타난 민간위원과 청주시의 이견을 조정하고 조율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갑론을박과 역사학자 등의 고증을 거쳐 기본방향을 확정하고 2008년 11월 공모사업으로 사업자를 확정하고 2009년 본격적인 3.1공원 정비사업을 추진하여 2010년 3월 1일 준공을 하였다. 특히 정비사업을 통해 기존의 단조롭고 지나치게 높아 친근감 없다는 의견을 반영해 동상높이를 낮추었다. 또한 부조벽화에는 ‘충북만세운동의 본격적 시위’, ‘시위에 대한 일제의 폭거장면’, 미원장터의 청주군내 최대의 만세운동’, 청주부근 산위의 대규모 군중봉화 만세운동’을 묘사해서 새겨 넣었다. 그리고 정춘수동상 죄대는 철거하고 그 자리에 충북 3.1운동의 상징적 방식이었던 횃불시위를 형상화란 조형물을 제작하였으며, ‘충북3.1운동사’ 및 정춘수 동상 철거와 3.1공원정비사업의 의미를 기록하여 후세에게 거울로 삼게 했다.

4. 결론 및 시사점

 

3.1공원은 지방정부, 보훈단체, 시민단체가 이견을 상호존중의 정신에 기초한 지속적인 숙의 과정을 통해 다양한 복수의 대안들 중 하나의 최적 대안을 합의할 수 있었다는데 의미부여를 할 수 있다. 특히 정책형성이 기계적 반복적으로 행하는 정형적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 선례가 없었던 비정형적 문제의 경우 다양한 이해관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일상적인 업무처리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에서 민간기구와 행정이 어떻게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바람직한 해법이 되고 최적의 의사결정 모형이 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 시사점이 있다.

3.1공원 재정비 사업은 정춘수 동상 철거 이후 흉물로 방치되면서 외면당하던 청주3.1공원이 직업, 성별, 연령, 종교, 지역을 초월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한 충북지역 민중들의 자유, 독립, 평화에 기초한 자주 독립의 의지를 알리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춘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춘수(鄭春洙, 일본식 이름: 가타니 슌쥬(禾谷春洙), 1875년 2월 11일 ~ 1951년 10월 27일)는 한국의 감리교 목사로, 독립운동가였으나 후에 친일파로 변절했다. 아호는 청오(靑吾)이다.

 

○ 생애

충청북도 청원 출생이다. 1904년 원산에서 선교사를 통해 세례를 받고 감리교에 입교한 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목사가 되었다. 그는 부흥회 집도에 특히 능력을 보였고, 원산의 교회에서 근무 중 1919년 3·1 운동을 맞았다.

 

정춘수는 그해 2월 경성부에서 오화영, 박희도의 권유를 받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원산으로 돌아가 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을 조직한 뒤 당일 기차편으로 상경했으나, 태화관 모임이 끝나고 관련자들이 체포된 뒤였기에 자수하여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출옥한 뒤 개성의 교회에서 근무하고 신간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를 맡는 등 서울에서 목회를 하던 중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전향서를 발표한 뒤부터는 친일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듬해 일제의 비호 아래 조선 감리교회의 수장인 감독으로 피선되었고 내선일체에 철저히 순응할 것을 요구했다. 이후 일본제국이 일으킨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감리교회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할 때도 앞장서는 등 조선 개신교회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꼽혔다...

 

개신교 내부의 사상 검사 단체로 일제 경찰과 결탁하여 신사참배를 독려한 총진회 회장, 전시 총동원 체제 건설을 위한 친일 단체들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1941년), 그리고 친일 종교인 모임으로서 개신교 교인들의 지원병 참전을 부추긴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1944년)를 지냈다. 심지어는 일본군을 위한 특별 기도, 애국 헌금과 무기 제조를 위한 철문과 교회종의 헌납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에도 감리교 내부에서 반발이 많았던 정춘수의 이러한 친일 행적은 해방 이후 감리교의 재건파가 1947년 《감리교회 배신배족 교역자 행장기》를 발간함으로써 드러났고, 1949년에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두 달간 구금되기도 했다. 감리교회 내에서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거센 비판이 계속되자, 정춘수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당시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는 체 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1949년 명동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천주교회로 개종했으며, 한국 전쟁 발발 후 고향에 피난해 있다가 사망했다.

 

 

○ 사후

청주의 삼일공원에 충북 출신 민족대표인 손병희, 신석구, 권동진, 권병덕, 신홍식과 함께 동상이 설치되었다가, 친일 행적과 관련된 항의로 철거된 일이 있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2008년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005년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펴낸 자료집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에서 선정한 감리교 내 친일 부역자 명단 12명 중에도 들어 있다.

 

 

 

 

충북지역의 3·1운동

 

3·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하여 통치하는 동안 일어난 최대의 민족독립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50일 가까이 각계각층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여 서울과 지방은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 미주 등 국내외적으로 확대된 20세기 한국민족독립운동의 분수령이었다.

 

이러한 3․1운동을 촉발시킨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석구 신홍식 정춘수(후에 변절) 6인이 충북출신인 점은 충북인의 크나큰 자랑이다.

 

충북지역의 3․1운동은 3월 2일 독립선언서가 청주에 배포되어 여러 차례 시위를 꾀하였으나 사전 발각되는 등 일본관헌에 의해 저지되다가 3월 19일 괴산읍 장터에서 홍명희 등의 주도로 본격적인 만세시위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4월 19일 제천 송학 시위까지 만세함성이 그치지 않았다. 당시 충북지역의 시위는 경기지역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충북의 만세시위는 사람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장날에 주로 이루어졌다. 시장이나 관공서 주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일본관헌의 체포 연행에 맞서 낫 곡괭이 몽둥이 돌멩이 등을 들고 경찰주재소나 면사무소를 습격 파괴하는 등 강압적인 식민통치와 무력진압에 격렬히 대항하였다.

 

충북지역의 3․1만세운동은 유학자와 젊은 농민과 학생층의 주도와 참여가 두드러졌다. 특히 충북은 낮의 시위뿐 아니라 밤에도 횃불만세라는 독특한 시위를 전개하여 일본군경의 무력진압에 직접 맞서기 어려운 노약자들까지 호응하였다. 남녀노소가 밤에 주변 산위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거나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횃불만세운동은 인근 충남, 강원, 경기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충북의 3․1운동은 도내전역에서 50여 차례 수 만 명의 민중이 참여하여 수 백 명의 인명피해를 냈지만 1910년대 후반 의기소침하던 의병운동의 맥을 살려 새로운 민족독립운동의 깃발을 올리면서 1920~30년대 한국민족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3․1운동을 촉발시킨 것은 민족대표 33인이었지만 이 운동을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승화시켜 세계의 이목을 집중케 한 것은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이 땅의 민중들이었다.

 

2010. 3. 1

 

3․1공원정비추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