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통일신라시대 청주의 역사적 진실과 문화

송재봉 2010. 9. 30. 15:00

 청주역사문화기행 3번째 순서로 청주의 통일신라시대 문화유산과 역사를 찾아 나섰다. 이번 기행에도 지역의 향토사를 연구하고 있는 강태재 충북참여연대 공동대표께서 길안내를 해주었다. 이래 글은 이번 기행을 위해 강태재 대표가 써 주셨다.

청주 보살사

청주 보살사 앞에서 부처님께 올렸던 바나나를 먹으며..


주역사문화기행③

통일신라 9주5소경의 핵심 서원소경
신라사적비, 석조여래상, 마애불, 석탑…불국토세계관


통일신라시대, 청주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확대된 영토와 인구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중앙정치기구는 집사성을 중심으로 10여 개의 관부를 설치하고, 지방은 9주5소경으로 정비하였다. 주(州)-군(郡)-현(縣) 체계가 군사 행정적 거점으로서의 성격이 강한데 비해 소경(小京)은 주로 정치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성격이 강했으며, 점령지역을 견제 감시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원(충주)소경에 가야사람, 남원소경에 고구려의 옛 지배계급을 강제 이주시킨 것과 달리 청주에 설치한 서원소경은 신라의 귀족세력인 아찬(阿湌, 17관등의 6위) 원태(元泰)가 최초로 최고책임자인 사신(仕臣 또는 仕大等)에 임명되어 신라의 통치계급의 이주와 함께 주변 여러 곳의 지방민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신문왕 5년(685)에 설치된 서원소경은 금강유역의 옛 백제지역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적합한 지역이라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4년 뒤인 689년에 서원소경성(西原小京城)을 축성하여 미호천(美湖川) 유역의 통치거점을 마련했으며, 경덕왕 18년(759)에는 서원경으로 개칭하였다.

본래 백제의 상당현이었던 지역에 통일신라가 소원소경을 설치하는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와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청주지역은 당시 신라의 왕도 금성(경주)에서 상주-보은-청주에 이르는 통로가 있었고, 여기서 북동으로는 증평/도안-충주에 이르고, 북으로는 진천-죽산-안성을 거쳐 한강유역에 통하며, 서쪽과 서북쪽으로는 공주와 남양만에 이르는 옛 백제가도 상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동으로는 한남금북정맥(노령산맥)의 산지를 등지고 서쪽으로는 구릉지가 연이어져 있는 준평원에 곡창지대인 미호평야가 펼쳐져 있는 분지이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볼 때, 금강유역의 옛 백제 지역(熊津, 공주)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적합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소경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것이다. 한편 삼국통일 뒤 한반도에서 당나라군대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상당기간 우암산성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 평지에는 부모산성, 동쪽 산지에는 상당산성을 배후로 삼았을 것이다.

서원소경은 그 중심부와 주변의 일정한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서원경성의 중심적 위치가 어느 곳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시되고 있지만 현존하는 유적으로 보면 청주시 동부에 위치한 와우산(우암산)의 내외곽과 배후의 상당산성으로 일단 규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통일신라의 사찰과 관련된 유적이 현재의 우암산과 그 서쪽에 전개된 평야에 집중돼 있는 것으로 보아 우암산 일대와 무심천 유역으로 짐작된다. 이곳은 우암산의 내성과 외곽 및 옛 읍성이 자리잡고, 그 외곽은 무심천변의 평지와 낮은 구릉지대이다. 이곳이 서원소경의 중심부가 자리 잡은 곳이며, 여기에는 도시계획의 흔적도 있고 평지에 장방형으로 축조된 성에 둘러쌓여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청주 상당산성 남문 비탈과 우암산성 내에서 ‘사량부(沙梁部)’와 ‘탁부속(啄部屬)’이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고 있어 서원소경에도 왕도 금성(경주)를 축소 모방한 6부가 설치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소원소경과 그 주변에 있는 산성에는 소경여갑당(小京餘甲幢, 지방군)에 소속된 병력이 주둔하고 있으면서 관할 내의 치안유지와 유사시에 대피하여 농성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 봉명동·명암동·용담동·금천동 등지에서 발굴 조사된 통일신라시대의 무덤과 신문왕 6년(686) 운천동 신라사적비(도 유형문화재 134호,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8세기 보살사 석조이존병립여래상(도유형문화재 24호), 8~9세기 운천동 출토 동종(보물 1167호,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9세기 정하동 마애비로자나불좌상(도 유형문화재 113호), 9~10세기 탑동 오층석탑(도 유형문화재 25호), 통일신라말 용암사 비로자나불좌상(도 유형문화재 23호, 청주대 박물관 소장), 나말여초 용화사 석불상군(보물 985호), 목우사지 석조여래입상(도 유형문화재 270호, 용암동 봉황사 소장) 등 불교 유물들이 남아 있어 당시의 문화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일본의 정창원에서 발견된「신라촌락문서」는 서원경과 부근 마을의 사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사회경제를 연구하는데 중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운천동 사적비는 신문왕 6년(686)에 보혜스님이 이곳에 절을 짓고 사적비를 건립한 시점이 서원소경이 설치된 직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절의 창건은 서원경성의 설치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비의 건립에는 아간(阿干) 천인(天仁) 등이 시주자로 참여하고 있는데, 국주대왕(國主大王)으로 표현된 신문왕에 대한 축도(祝禱)와 삼국통일의 성취 및 국부민안(國富民安) 등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점으로 보아, 서원소경이 왕권과 일정한 관련 하에서 설치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 비는 사륙병려체(四六騈儷體)의 문장을 유려하게 구사하고 있는 점에서 당시 소경의 문화적 수준을 엿보게 해준다.
한편 문무왕 13년(673)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삼존석상(국보 106호)과 미륵보살 반가석상(보물 368호) 그리고 신문왕 9년(689) 기축명 아미타여래 제불보살석상(보물 367호)은 암적갈색의 연질 납석을 사용하여 정교하고 장엄한 조각 기술과 흔하지 않는 옛 양식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60년 9월 충남 연기군 전동면 다방리 비암사에서 발견돼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처럼 당시 불교는 국가의 통치이념으로서, 또한 통일의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했다는 점과 탑동 5층석탑과 보살사의 이존병립여래좌상을 통하여 확인되듯이 이 땅이 곧 불국토(佛國土)라는 세계관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며, 신라말과 고려초의 전환기에 화엄경(華嚴經)의 주불(主佛)로서 인식되었던 비로자나불상이 양식적으로는 중앙 왕실과의 연관성을 가지고 상당수 조성되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