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억울하게 희생되신 분들을 위한
추모공간을 만들어야 해요
▪송재봉 :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장풍차 회장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장풍차 회장님은 한국전쟁 충북유족회장으로 계시죠. 오늘 회장님의 오랜 경험과 지혜를 나눠주셨으면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선 안덕벌이 보도연맹으로 인한 희생자가 집중된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 장풍차 회장 : 제가 10살 때쯤에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들 중에 하나가 동네에 ‘테러단’(여기서의 테러단은 1947~8년경 서북청년회와 대동청년단을 일컫는 말이다 : 편집자 주)이 들어온다고 했던 거였어요. 그때는 테러단이 무엇인지를 몰랐죠. 그런데 해방되고 동네 사람들이 보도 연맹에 가입되어, 좌익, 빨갱이로 몰리고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까 테러단이 경찰이었던 거 같아요. 그 당시에는 따지거나 하면 그냥 빨갱이라고 인식이 되었던 거 같아요.
이제 이런 생활을 계속 하다가 6.25가 터진 거예요. 그래서 피난을 가야 하는데, 보도연맹과 관련된 사람들은 전부 경찰서로 오라는 거예요. 그 당시에 보도연맹 관련 사람들이 우리 동네에 아버지를 포함해 51명이 있었어요. 그들이 다 경찰서로 끌려간 거예요. 피난시켜줄 테니까 오라고 했거든요.
▪송재봉 :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피난시켜준다고 오라고 한 거예요?
▶ 장풍차 회장 : 그래요. 어머니나 동네 분들이 경찰서로 밥을 해서 나르는 걸 본 기억이 있어요. 그때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보도연맹원들을 다 죽인다는 소문이 있다고 말씀하셨대요. 그러니까 아버님이 ‘무슨 소리여, 피난시켜준다는데 왜 죽여. 애들이나 잘 봐’이랬대요.
이후에 우리 식구는 남일면 쌍수리로 피난을 가다가, 그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져 고개넘어 우리 식구들은 낭성며 갈산리 쪽으로 피난을 갔어요. 아버지는 경찰서에 끌려가신 후에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고요.
그때 피난을 가다가 2-30명 씩 태운 트럭이 계속 지나갔는데, 그게 보도연맹 사람들을 태우고 간 거였어요. 그 사람들을 그냥 아무 골짜기 구덩이 같은 데에다가 넣고 학살한 거예요.
▪ 송재봉 : 아버님은 그러면 어떻게 되신 거예요?
▶ 장풍차 회장 : 전혀 몰라요. 추측하기로는 우리 동네 사람들 모두 남일면 분터골에서 돌아가신 거 같다고 하는데, 행방을 아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때 안덕벌에서 희생되신 분들도 어떻게 희생됐는지도 아직 까지도 전혀 모르고요.
▪ 송재봉 : 보도연맹원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이 있지는 않았나요?
▶ 장풍차 회장 : 시간이 지나니까 동네에서 보도연맹은 그냥 빨갱이라고 인식이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 동네를 빨갱이 동네라고 시내에서는 그렇게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어요. 쉬쉬하고 숨어 사는데, 집안의 기둥이던 아버지들이 돌아가시니까 농사 지을 사람도 없고 양식이 모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일부 집안은 콩나물 장사를 하고, 우리 어머니도 두부 장사를 했어요.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죠.
▪ 송재봉 : 말도 못 하고 계속 숨기고 살아오셨던 거네요.
▶ 장풍차 회장 : 6촌 형의 아들 중 한 명이 일본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조총련이랑 연계됐다고 끌고 가서 조사를 받았어요. 좌익 활동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빨갱이 동네로 알려져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어요.
아버지들이 돌아가시니까, 콩나물 장사를 하기도 하고,
우리 어머니도 두부 장사를 했어요.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죠.
▪ 송재봉 : 그렇게 친척과 가족들을 지속적으로 감시를 당한 거네요?
▶ 장풍차 회장 : 그렇죠. 감시를 한 거예요. 그나마 우리는 배운 게 없고 가족들 중에 공무원도 없으니까 조사를 받지는 않았어요..
▪ 송재봉 : 그러면 노무현 정부 때 과거사법이 통과되면서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구성됐잖아요. 그때 피해자들한테 신청을 받았는데, 그때 신청을 안 하신 건가요?
▶ 장풍차 회장 : 저는 몰랐었는데, 형님이 저도 모르게 이름만 적어서 낸 거예요. 그리고 신경을 안 쓰고 내버려 두었는데, 진실 규명이 나왔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희생자라고 인정은 해 주었는데, 피해보상 신청을 제대로 못한 거죠.
▪ 송재봉 : 그러면 현재 유족회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신 건가요?
▶ 장풍차 회장 : 유족회는 일단은 투쟁을 해야 하잖아요. 국회에올라가 법을 통과시켜달라고 전국에서 모이는 거죠.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 때 통과가 됐고,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구성이 된 거죠.
▪ 송재봉 :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진실 규명 신청을 하셨나요?
▶ 장풍차 회장 : 신청을 했죠. 그리고 진실 규명이 나왔어요. 그래서 이제는 보상 재판 소송을 하려고 서류 준비 중이에요. 그래도 아직 유족회 회원 중에 7-80명은 진실규명 결정이 안 됐어요.
▪ 송재봉 : 피해보상 소송을 위한 재판을 준비 중인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네요. 그러면 피해자라고 인정이 되고 진실 규명이 된 경우에는 소송을 하면 대부분 피해 보상이 이루어지나요?
▶ 장풍차 회장 : 이루어질 걸로 보는데, 패소하는 경우도 있긴 하더라고요. 근데 보도연맹 관련돼서는 패소한 경우가 없는 것 같아요.
▪ 송재봉 : 그렇군요. 진실규명, 명예를 회복시키는 활동도 하고 법을 만드는 과정에도 참여하는 활동을 해 오셨는데, 그 외에는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 장풍차 회장 : 매년 6월 무렵에 위령제를 지내요. 이번에 오창에서는 11월 17일에 위령제를 지낸다고 하더라고요.
▪ 송재봉 : 유족회마다 행사가 다른 거 같네요. 안덕벌에는 그 당시에 희생되신 분들의 후손들이 아직도 살고 계신가요?
▶ 장풍차 회장 : 지금 거의 10명 정도 되는 거 같아요. 근데 그 중에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을 안 한 사람도 있어요. 우리 집안의 7촌 조카가 자기 삼촌이 희생자인데, 자식들한테 지장을 줄까 봐 신청을 안 하더라고요.
▪ 송재봉 : 그래도 이번에 피해자로 인정을 받아서 마음의 짐이 조금은 가벼워지셨겠어요.
▶ 장풍차 회장 : 마음이 가벼워졌죠. 우리가 14년을 국회의사당에 갔어요. 사실 문재인 대통령이 됐을 때 바로 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국민의힘이 자꾸 발을 걸어서 늦어지기도 했고요.
▪ 송재봉 : 맞아요. 조금이라도 빨리 통과가 돼서 진실화해위원회가 제대로 구성되고 운영이 돼야 했는데, 그렇게 안 됐었죠. 지금 정권에서는 진행이 더디고 운영이 안 되는 상황이잖아요. 많이 답답하실 거 같아요. 회장님께서는 살아오시면서 제일 억울하거나 답답하다고 느꼈을 때가 언제인가요?
▶ 장풍차 회장 : 못 배운 게 제일 아쉽죠.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학교라도 갔을 텐데 중학교도 못 갔어요. 저희 어머니가 고생을 진짜 많이 하셨어요.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어머니가 논 1,200평, 밭 1,700평을 혼자 다 농사를 지으셨어요. 우리가 거들어 주기도 했지만 진짜 고생 무지 하셨죠.
▪ 송재봉 : 그런 거는 보상받을 길도 없는 일들이잖아요. 그런 게 참 안타깝죠. 그러면 이제 진실 규명도 되고 보상이 이루어진다면 그 다음은 명예회복이 필요한데,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장풍차 회장 : 명예 회복이 꼭 필요하죠. 그러기 위해서는 유족회가 서로 협력해야 해요. 소송에서 승소하면 신청을 한 사람들만 받지, 못 한 사람들은 못 받잖아요. 그 사람들도 우리하고 같이 진실 규명이 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 하니까요. 그러면 유족회 운영도 더 어려워져요. 보상 받은 사람들은 신경을 덜 쓰게 되거든요. 그렇게 운영되지 않도록 끝까지 신경을 써야죠. 마무리까지 잘 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게 숙제인 거 같아요.
▪ 송재봉 : 또 워낙 희생자분들도 많고, 전국에 흩어져 있다 보니까 전체적인 추모 사업도 필요하잖아요. 문재인 정부 때 국가 차원에서 추모 공간을 조성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는데, 그 얘기도 들으셨나요?
▶ 장풍차 회장 : 들었어요. 추모공원은 분터골에 만들어야 해요. 추모비도 만들어서 어느 때고 찾아 가서 추모할 수 있게 해야죠. 추모비에는 억울하게 희생되신 분들이 이름도 기록해 놓고요.\
14년을 국회의사당에 갔어요.
과거사법이 바로 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국민의힘이 자꾸 발을 걸어서 늦어지기도 했고요.
▪ 송재봉 : 정부나 지자체에서 하지 않으면, 유족들이 직접 추진할 생각도 있으신 거네요?
▶ 장풍차 회장 : 그렇죠. 보상 받으면 그걸로 해 봐야죠.
▪ 송재봉 : 제가 듣기로 희생됐던 장소에서 유골이 많이 발굴됐다고 들었어요. 후손들이 그 유골을 보고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이게 참 답답할 거 같아요.
▶ 장풍차 회장 : 분터골에서 한 39구(진실화해위원회는 2006~7년까지 분터골에서 유해발굴조사를 실시해 337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 편집자 주)가 추가로 나왔다고 하는 거 같은데, 추측만 하는 거죠. 그냥 분터골에서 나왔다고 하니까 얼추 맞는 거 같은데 하는 거죠.
▪송재봉 : 그리고 유골들이 발굴이 되면 제대로 모시고 있을 곳도 마땅치 않다고도 하더라고요. 제대로 만들어서 전국에 있는 유골들을 한 곳에서 잘 모시고 추모 행사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국가적 과제이기도 하고, 유족들의 기대나 요구이기도 한 거 같아요.
▶ 장풍차 회장 : 그렇죠. 잘 되었으면 해요. 보상만 이루어진다면 오창과 같이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도 오창은 추모비라도 해 놨거든요.
▪ 송재봉 : 그런 식으로 표식이라고 해놓는 것이 옳은 거 같아요. 오늘 얘기를 들으면서 고생을 참 많이 하셨던 거 같은데, 어떻게 살아 오셨는지 들려주세요.
▶ 장풍차 회장 : 저는 국민학교만 나오고 양복 기술을 배웠어요. 그리고 맞춤 양복 일을 했죠. 그 다음에는 청주대학교 경비부터 여러 학교 경비원으로 20년 정도 일했죠. 요즘은 율량중학교 학교폭력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고요.
▪ 송재봉 : 꾸준하게 일을 하시고, 성실하게 살아오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늘 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덕분에 제 몰랐던 것을 많이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지역사회에서 훌륭한 어른으로써 활동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해 주신 말씀들을 잘 새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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