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차례의 주민투표가 실시된 시점에서 우리는 주민투표가 풀뿌리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제도가 아니라 풀뿌리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후퇴시키는 적폐가 되고 있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11월 2일 실시된 경주, 군산, 영덕 등지에서의 방폐장 유치 주민투표와 9월 29일 청주-청원 통합 주민투표는 현행 주민투표 제도의 한계와 그 운영의 문제점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먼저 지난 11월 2일 실시된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주민투표는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보여주었다.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고 주민자치와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주민투표 제도의 취지를 왜곡하고, 중앙정부의 국책사업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으며, 투표의 핵심적 가치인 공정성이 없이 강행되었다.
첫째, 지방자치단체장, 공무원, 통ㆍ반ㆍ이장 등 관조직이 대거 동원되었다. 찬성률이 가장 높았다는 경주시의 시장은 삭발을 하면서 찬성을 호소하기도 했다. 찬성률을 높이기 위해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공무원들이 동원되고 말단 행정조직인 이장, 통.반장들이 동원되었다. 또한 사전투표운동에 대한 법조항이 애매한 것을 악용하여 주민투표발의하기 전부터 공무원이 총동원되어 찬성 쪽만 홍보하고 다녔다. 이는 주민투표법은 물론 공무원법에도 위반되는 불법행위이다.
둘째, 투표운동자금에 대한 규제도 없어서 무제한적으로 금권이 동원되었다. 현행 주민투표법상 투표운동 자금에 대한 규제가 전무한 허점을 악용하여 이처럼 금권을 동원한 것은 투표의 공정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이다. 선거법상으로는 선거자금에 대한 규제가 있는데, 주민투표법에서는 아무런 규제를 만들어두지 않은 것이 악용되었다.
셋째,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이 지방차지단체의 입맛에 맞는 특정 이해 관계집단에게 왜곡 지원되는 경향이 있다. 경주의 경우 15억원의 예산이 유치홍보에 편성되었다.
넷째, 부재자투표 신고율을 높이는 데에 관 또는 특정 조직이 동원되어 부재자 투표 신고율이 정상적인 선거보다 20배가 넘게 나왔다. 부재자투표 요건을 완화한 허점이 이용된 것인데 최종투표율이 70.78%로 찬성률이 가장 높았던 경주의 경우, 부재자투표신고율은 38.1%였다. 반면에 지난 10월 26일 치러진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부재자투표신고율은 1.6%에 불과했었다. 이런 사상 초유의 부재자투표율은 강력한 관권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부재자투표에 대해서는 공개투표 시비까지 일고 있으며, 상당수가 본인의사와 무관하게 신고를 한 것으로 드러나, 관의 개입이 투표와 관련된 국민의 기본권을 근본적으로 훼손하고 침해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다섯째, 방폐장 같이 인접지역에 민감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해 인접 지방자치단체인 충남 서천군(군산 인근), 울산광역시 북구(경주 인근)에 대해서는 투표에 참여할 기회를 부여하지 않아 반발을 샀다. 실제로 방폐장 부지로 발표한 경주시 양남면 봉길리의 경우에는 경주시내보다 울산 북구가 훨씬 가까우므로 정부가 투표구역 설정의 정당성이 문제가 된다. 실제로 주민투표법 제8조 제1항에 의하면 중앙정부 장관이 관계 지방자치단체에 주민투표 실시를 요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관계 지방자치단체’를 정함에 있어서 부지예정지로부터의 거리, 생활권, 부지로 인한 사회ㆍ경제적 영향권 등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행정구역 기준으로만 설정한 것은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한편 지난 9월 29일 실시된 청주ㆍ청원 통합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는 지방자치단체간 사안이라는 점에서 11월 2일의 주민투표와는 다르지만, 비슷한 문제점이 나타났다. 정치이해관계 집단들이 특정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금권과 조직을 동원하고, 부재자 투표의 본질을 왜곡하는 조직적 부정 등의 문제가 그것이다. 또한 선거비용의 상한선이 없었고 정치적 입장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찬성 혹은 반대운동의 기회를 공정하게 보장하지 않는 등의 문제 역시 동일하게 나타났다. 한편, 두 자치단체간의 통합을 묻는 주민투표임에도 찬반 운동의 공간을 주소지 자치단체로 제한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설득과 이해의 기회를 제한한 것도 문제였다.
이렇듯 관 또는 특권집단의 개입과 주도 아래서 여론 호도와 왜곡이 노골적으로 이루어진, 잘못된 주민투표 제도와 왜곡된 운영은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다. 특히 다른 주요 정책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도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우리는 풀뿌리민주주의를 유린하는데 악용되는 것이 아닌, 진정한 주민참여를 보장하는 주민투표 제도의 본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주민투표 제도를 아래와 같이 개정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1. 국가정책에 관한 주민투표 조항을 삭제하라!
설사 국가사무에 대해 ‘자문적 주민투표’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중앙행정기관에게 주민투표실시요구권을 부여하는 것은 주민투표의 근본 취지를 훼손한다. 다만 국가적 입법사항이나 국책사업에 대한 의견수렴이 필요하다면, 주민청구나 지방의회 발의에 의해 의견수렴을 위한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도록 하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주민투표법 제7조 제1항에서 단서로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에 속하지 않는 사항이라도 주민청구나 지방의회발의가 있으면 의견수렴을 위한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라는 조항을 삽입하여, 지방자치 차원에서 자율적 판단에 의해 실시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주민투표에 대한 금권, 관권 개입을 엄격히 차단하라!
관권, 금권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통ㆍ반ㆍ이장 및 향토예비군 소대장급 이상 간부, 의회의원, 특별법에 의한 국민운동단체 임직원은 투표운동을 할 수 없도록 금지해야 한다. 의회 의원의 경우, 주민투표 운동을 빙자하여 사전선거 운동으로 악용하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아울러 주민투표운동에 사용하는 비용의 상한선을 정하게 하여야 한다. 또한 주민투표운동에 사용한 비용의 수입ㆍ지출내역을 투명하게 하고, 투표공영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해야할 것이다.
3. 기타 주민투표의 공정성, 민주성, 신뢰성을 제고하기 위한 제도 개선을 추진하라!
정보제공을 빙자한 관권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주민투표와 관련한 정보제공은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라 투표관리를 책임진 선관위가 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부재자투표신고가 악용되지 않기 위해서는 부재자신고요건을 엄격하게 고쳐야 한다. 그리고 관의 투표독려운동은 사실상 특정입장을 지지하도록 유도하는 투표운동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금지하고 선관위의 투표참여홍보활동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찬ㆍ반 운동 대표단체가 함께 참여하는 합동주민설명회 개최를 의무화하는 등 투표 공영제를 강화해야 한다. 아울러 주민투표권자 연령이 현행 20세로 되어 있는바 공선법의 기준에 맞추어 19세로 하향조정하여야 한다.
이와 함께 주민투표제도가 주민 참정제도로서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로 개정되어야 한다.
4. 주민투표 청구 요건을 완화하라!
주민투표제도가 진정한 주민참여의 제도가 되려면 중앙정부의 요구권은 제한하고 주민의 청구권은 대폭 완화해야 한다. 현행 주민투표법 제7조에서는 주민이 주민투표의 실시를 청구하기 위해서는 주민투표청구권자 총수(20세 이상 유권자 및 일정요건을 충족하는 외국인)의 20분의1 이상 5분의 1이하의 범위 내에서 조례로 정하는 수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는 지나치게 높은 것으로 실질적 청구를 어렵게 한다.
따라서 주민투표의 청구요건은 주민투표청구권자 총수의 3%-5%(광역지방자치단체는 3%, 기초지방자치단체는 5%)의 서명을 요구하는 것으로 하되, 광역지방자치단체의 경우 10만명을 상한선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 주민투표 대상의 지나치게 광범위한 제한을 폐지하라!
주민투표법 제7조 제2항에서는 주민투표에 부칠 수 없는 사항들을 광범위하게 나열하고 있다. 그 중 제1호 “법령위반 또는 재판중인 사항”에서 “재판중인 사항”도 그 의미가 불명확함으로 삭제해야 한다. 또한 제3호의 “지방자치단체의 예산ㆍ회계ㆍ계약에 관한 사항”이야말로 지방자치단체 정책의 핵심이므로 주민투표가 필요하다. 따라서 지방의회의 예산안 의결, 결산승인에 관한 사항만 주민투표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해야한다.
6. 동일의제에 대한 투표운동의 주소지 제한 규정을 폐지하라!
두 개 이상의 주민자치단체가 동일 의제 및 동일한 사안에 대해 주민투표를 할 경우, 투표운동을 해당 자치단체 관할 주소지로 제한한 현 규정은 주민들의 알권리와 올바른 정보제공을 차단하고특정지역의 이해 당사자들에 의해 여론을 조직적으로 선동ㆍ호도하여 주민의 의사를 왜곡시키는데 악용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제한은 없애야 한다.
주민투표법 제정의 취지를 올바로 살리려면, 위에서 우리가 정리한 바, 주민들의 참여는 활성화하고,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중앙행정기관, 특정 이해 당사자들에 의한 악용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 보완해야 한다. 또한 제도 개선과 더불어 주민투표와 그 운영에 대한 정부와 자치단체, 그리고 주민들의 태도와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 특히 중앙정부와 자치단체장은 주민투표를 주민의견을 조작하고 호도하는 계기로 악용하려는 그릇된 자세를 버려야 한다.
풀뿌리 민주주의 파괴하는 주민투표법의 개정을 촉구한다
국내연대/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 : 2005/11/2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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