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청주박물관 청원 두루봉 동굴의 화석을 보며 선사시대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강태재 대표와 기행단원
충북참여연대 문화위원회는 청주의 역사를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시대별로 나누어 총 9회의 기행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지난 6월 26일 그 첫번째 행사를 청주박물관에서 시작하였다. 걸어서 청주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역사와 만나는 시간은 참으로 흥분되고 감동적이었다. 청주의 역사를 현장에서 발로 뛰며 연구해온 강태재 충북참여연대 공동대표님의 안내 말씀과 쉽게 풀어쓴 답사기는 다른 어떤 기행에서도 맛볼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이자 청주 시민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그 첫번째 기행을 위해 준비한 강태재 대표님의 청주역사 이야기 연재를 시작한다.
마한의 소국에서 백제의 상당현으로 신봉동 백제고분군 백제유물전시관 입구에서 청주 옛지도 인쇄체험하는 아이들
송절,봉명동 집터와 무덤-정북동 토성-신봉동 공동무덤
청주 땅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을까? 청주역사문화기행 첫걸음은 아무래도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 나서야 되지 않을까?
“동으로는 우암산성이 있는 청주의 진산이 있고, 멀리 상당산성이 바라다 보이며, 북동으로는 평지토성인 정북동토성이 있고, 서쪽으로는 부모산성이 보이는 등 사방에 걸쳐 삼국시대 성들이 3~4㎞ 이내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 미호천과 무심천 합류지점의 낮은 구릉지는 옛 사람들의 터전일 수밖에 없다.”
이곳은 어딜까? 청주남쪽 팔봉지맥의 용덕산에서 갈라져 북으로 망월산-구룡산-명심산으로 이어져지는 산줄기. 청주의 도심에 깊숙이 들어오며 동쪽으로 무심천과 서쪽으로 석남천을 가른다. 속칭 명심산(明心山)일대는 북서쪽으로는 송절동, 봉명동 유적이 산재하고 동남쪽으로 신봉동백제고분군이 엄청난 규모로 남아 있다.
“북쪽으로부터 남하한 백제 건국세력이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점차 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던 시기, 청주지역에서는 앞선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문화의 모습이 나타났다. 2~3세기 청주지역은 금강 중상류지역과 동일한 고고학적 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백제의 중앙세력과는 다른, 이 지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마한의 여러 소국 중의 하나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은 하천변의 구릉에서 발견되는 무덤과 외적을 막기 위해 평지에 쌓아올린 토성이 대표적이다.”
2세기 북쪽으로부터 철기문화가 유입되면서 한반도 중서부지역에서는 토착의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토착적인 정치세력이 대두하였다. 송절동유적과 정북동토성은 백제세력이 미치기 이전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정치집단의 문화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선사유적을 현장에서 직접 볼 수 있도록 보존되지 못해 국립청주박물관 등의 전시유물로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은 아쉽지만, 마한시기의 유적은 직접 현장을 찾아 나서보자.
마한 소국 중의 하나에 속한 정북동토성
먼저, 정북동토성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이곳은 토성이 축조되기 이전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백제시대와 통일신라시대, 후삼국시대 그리고 현대까지 여러 시기에 사람들이 살았던 주거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1세기경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在地勢力)은 목책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북동토성을 판축기법(版築技法)으로 쌓은 것은 2~3세기경이다. 정북동토성을 가리켜 ‘청주의 풍납토성’이라 말하는 이도 있지만 한강유역의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함께 초기 토성으로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돼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런데 한강유역의 풍납토성의 조성시기를 측정한 결과 기원전2세기∼기원후2세기로 밝혀짐으로써 백제의 건국시기와 일치, 한성백제의 하남위례성이 풍납토성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 토성의 성격 규명은 백제사뿐만 아니라 한국고대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인 바 정북동토성 또한 청주의 재지세력과 초기 백제시대를 밝혀줄 열쇠는 아닐까. 이러한 방어시설을 구축하고 지배하는 데는 막대한 인력동원이 가능한 권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을 감안하면, 삼한시대를 전후한 시기 청주지역의 고대사를 밝혀낼 단서를 이곳에서 찾아낼 수는 없을까. 청주지역의 고대사를 밝혀내는 연구에 문화예산의 단 몇 퍼센트만이라도 할애해 내 고장의 역사 문화 연구에 지원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청주역사문화연구소’ 같은 것을 설립해야 되잖을까.
청주시는 2007년부터 성벽을 복원하고 정비하여 탐방로를 설치했으며, 진입도로 확장과 발굴조사, 성곽외부에 체험·학습장을 만드는 등 2010년까지 연차 별로 100억원을 들여 역사공원으로 조성한다. 정북동토성의 옹성과 치성, 동,서,남,북문의 형태와 토성의 판축기법이나 시대별 주거 모습 그리고 변천과정 등 상세한 사항은 현장에 설치한 설명 자료와 함께 꼼꼼히 살펴보자.
자, 이번에는 무심천을 건너 명심산에 올라 일대를 둘러보자. 송절동유적의 위치를 어림으로나마 짚어보고 신봉동고분군을 살펴보며 청주백제유물전시관으로 내려가자. 먼저 본관에서 신봉동 백제고분군을 비롯, 청주·청원의 백제유적(송절동, 봉명동, 가경동, 명암동, 청원 주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주요 유물에 대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별관까지 들르는 것을 잊지 말자. 고분군과 연계한 사적 공원으로서 백제사와 지역의 역사를 공부하는데 그만이다.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려면 강민식 학예사를 졸라야 한다.
백제유적 보물창고 신봉동고분군
4세기후반 백제는 근초고왕 때에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며 한강유역에서 벗어나 호서(충청)․호남지역으로 영역을 넓혀나간다. 이 무렵 청주지역도 백제의 영역에 들게 된다. 봉명동․명암동․가경동 등 4~5세기 유적은 청주의 백제 집터와 무덤 등을 통해 입지와 주거형태를 짐작케 한다. 이 시기 널무덤 속에는 다양한 토기그릇을 비롯해 철기류 즉 쇠로 된 농기구와 무기 그리고 철제갑옷과 투구, 말을 타기 위해 만든 마구류가 많다.
봉명동 무덤에서 나온,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새김글 <大吉>이 새겨진 청동방울 외에도 청주의 수많은 무덤과 유물은 문헌에 나타나지 않았던 백제연구의 귀중한 유물이다.
특히 신봉동백제고분군은 무심천변 명심산 낮은 구릉에 위치한 백제권역 최대의 무덤으로 5세기를 중심으로 4~6세기에 걸쳐 조성된 전사(戰士)들의 공동무덤으로 판단된다. 시기에 따라 상류 신분계층에 따라 산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작은구덩유구(火葬墓), 널무덤(木棺墓), 덧널무덤(木槨墓), 돌방무덤(石室墳)이 떼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철기류가 쏟아져 나왔다. 둥근고리큰칼(環頭大刀)를 비롯한 창, 칼, 화살촉과 얇은 철판을 결합하여 만든 갑옷(板甲)과 철제투구 그리고 말 재갈과 등자 등 마구류는 기마(騎馬)병사의 존재를 말해준다. 단지, 바리(鉢), 입큰항아리(廣口壺), 손잡이잔 등 다양한 형태와 재질을 보이는 토기의 변화를 통해 백제의 지방통치를 가늠할 수 있으며 백제의 영역 변화를 살펴 볼 수 있다. 새발자국무늬(鳥足文) 토기와 철기는 가야, 왜(倭)와의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엿 볼 수 있다. 새발자국무늬(鳥足文)과 함께 광구호, 손잡이잔은 토착문화의 발달과 문화전파의 경로를 파악하는 귀중한 자료로 이해된다.
특히 신봉동백제고분군에서 출토된 손잡이잔은 특유의 모양을 하고 있어 ‘신봉동배(新鳳洞杯)’라고도 한다. 최근 머그(mug)와 비슷한 이 잔의 용도에 대해 곡식의 양을 측정하는 양기(量器)로 보는 연구논문이 발표되기도 했다.
신봉동백제고분군에서는 이제까지 발굴된 백제유물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철기류가 출토되고 있다. 철제 갑옷과 투구는 백제권역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것으로, 철제 갑옷 기술을 받아들인 가야와 왜에 의해 크게 유행하였다. 또 말을 타기 위한 재갈과 발걸이는 기마전술(騎馬戰術)이 일반화 되어 원거리 전쟁수행도 가능해 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백제시대 청주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 지역에서의 치열했던 전쟁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보듯 신봉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명심산 일대 사방에 무덤과 집터가 분포하고 있어 신봉동~봉명동 사이 구릉지역이 백제 때 이미 우암산성, 부모산성 등 주변에 산성을 축조하고 상당현(上黨縣)이란 지방도시를 경영하였음을 알게 한다. 당시에도 중부내륙교통로상의 거점지역으로서 이곳을 통해 영남이나 호남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요시되는 요충이었고, 이후 삼국간의 세력 각축장이 되는 것이다.
이상, 청주역사문화기행 첫 일정은 이정도로 마칠까 한다. 시간이 허락하면 가경동유적도 가 보아야겠지만 집터, 저장구덩, 무덤과 함께 원형에 가까운 백제 오름가마(登窯)와 백제 기와가 처음으로 발견된 이곳은 택지개발로 인해 가마터가 절개사면에 위태롭게 걸쳐있어 곧 침하되고 말 것 같아 안타깝다. 우암산토성과 부모산성은 여러 시기에 걸쳐 있으므로 차후 적당한 때 찾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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