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청주 3.1공원` 충북의 역사공원으로 재탄생하다.

송재봉 2010. 2. 28. 18:10
 
청주 3.1 공원이 친일인사 정춘수의 동상이 시민단체에 의해강제 철거되는 우여곡절 끝에 충북지역 3.1독립운동의 새로운 역사공원으로 재 탄생하였다.

  청주 3.1공원은 1980년 8월 15일 충청북도가 주체가 되어 계획과 예산을 수립하고 청주시가 그 지침에 따라 시공을 하였으며, 형식적이지만 민간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건립하였다. 그러나 3.1공원 조성 당시 공무원과 유족대표 중심으로 사업이 계획되면서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학자나 독립운동 관련단체, 시민단체의 참여는 부족하었다. 

 따라서 충북지역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고증과 의미 규정, 민족대표 33인중 충북인사 6인의 행적에 대한 검증과정의 부족, 3.1공원 조성에 대한 시민적인 공감대 형성이 부재한 가운데 이름은 3,1공원이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민족대표 6인을 기념하는 공원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어 있었다.

 특히 심각한 문제는 건립당시부터 정춘수에 대한 친일문제가 논란이 되었으나, 그가 민족대표중 한명이였다는 이유만으로 동상건립을 강행하였다는 점이다. 이처럼 충분한 사전 검토 미비와 역사의식 빈약학은 이후 3.1공원의 위상을 스스로 추락시키고 지역사회내의 새로운 갈등구조를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다. 민족대표였지만 이후 친일인사로 돌변한 인물의 동상을 건립하여 지역주민과 학생들의 가치관에 혼란을 주고 함께 건립된 다른 독립운동가의 명예까지 실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끈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3.1공원내 정춘수 동상은 건립이후 부터 지속적인 논란거리가 되어오다 1993년 충북지역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가 친일잔재 청산 차원에서 정춘수 동상 철거를 문제를 공식화 하였다.  이후 1995년 2월 20일에는 정춘수 동상에 일장기가 둘려졌고, 1996년 2월 8일 오후 2시 시민단체 회원들에 의해 정춘수 동상은 목에 밧줄이 걸린채 강제로 끌어내려 졌다.
 

1996년 시민단체 회원들이 정춘수 동상에 밧줄을 걸어 넘어뜨리고 있다.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자 결국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이후 11년 공안 3.1공원에는 철거된 정춘수 동상의 좌대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상태로 방치되면서 동상 좌대를 철거하자는 주장에서 부터 좌대도 역사적인 기념물이고 교육적 가치가 있다는 차원에서 보존해야 한다. 정춘수 좌대위에 그의 독립운동과 친일행적을 동시에 기록한 비석을 세워야 한다 등등 갖가지 주장과 의견이 제기되는 등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논의는 없고 논란만 확산되고 있었다.

맨 오른쪽에 비어 있는 좌대가 친일파 정춘수의 동상이 있던 곳으로 10여년간 방치되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7년 8월 30일 광복회 충북지부와 33유족회가 주관하는 청주3.1공원 정춘수 동상 좌대 철거관련 토론회가 열리면서 이 논의가 본격화되었고. 같은해 12월 6일 정춘수 좌대 철거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시민단체와 보훈단체 간담회에서 정춘수 좌대를 철거할 것인지 말것인지 하는 관점에서 3.1공원 문제를 접근할 것이 아니라 3.1공원이 진정 충북의 3.1운동을 상징하고 후대에게 역사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는 근본적인 개선방안을 모색하자는 취지하에 3.1공원정비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후 3.1공원정비추진위원회는 충북참여연대, 충북민주화운동계승상업회 등 시민단체 관계자, 광복회등 보훈단체 대표, 정춘수 동상 철거에 참여했던 인사 등이 참여하는 재정비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2월 19일 첫 실무위원회 이후 2008년 2월 27일 충북지역 3.1운동과 3.1공원 재정비 방안 모색토론회 등 수차에 걸친 회의와 현장방문, 청주시와의 협의 등을 통해 3.1공원의 정춘수 좌대를 철거하고 그자리에 충북의 3.1운동을 상징하는 횃불 조형물 설치, 동상 뒷편으로 충북 각 지역의 3.1운동 모습을 형상화한 부조벽화, 동상 좌대 높이를 낮추어 시민과 친근한 이미지를 부여하는 등 전반적인 재정비 방안을 확정하고 청주시에 공식 건의를 하였다.
 청주시 사회복지과는 이상의 제안을 기초로 재원마련과 업체선정, 주변 조경사업 등을 진행하여 2010년 3월 1일 오후 2시에 역사적인 재정비 준공식을 개최하게 되었다.

 3.1공원은 이제서야 직업, 성별, 연령, 종교, 지역을 초월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한 충북지역 민중들의 자유, 독립, 평화에 기초한 자주 독립의 의지를 알리는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역사는 소수의 선각자에 의해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떠밀고 가는 이름없는 수많은 민중들의 힘이라는 사실을 많은 시민들이 청주3.1공원을 통해 느낄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를 해본다.



3·1공원 중수기 

 
 정의로운 자는 그 아름다운 이름이 후세에 전하고 불의에 영혼을 팔아 버린 자는 지탄을 면치 못한다. 우암의 산 그림자 서편에 기울고 무심의 맑은 물 비단처럼 비치는 여기정의가 살아있는 삼일공원이 있다.

1919년 일제의 강점으로 도탄에 빠진 나라를 찾고자 독립을 선언할 때 33인의 대표 중 충북 출신은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석구 신홍식 정춘수 여섯 분이 계셨다. 1980년 이 분들의 의로운 기백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 우암산 기슭에 역사공원을 조성하였다.

한때 독립운동의 선각자였고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였으나 친일매국의 길을 간 정춘수의 행적이 밝혀졌기에 1996년 2월 8일 충북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동상을 끌어내렸다.

싸늘한 청동 파르라니 녹이 슨 채 십 수 년이 지났다. 이제 정의로운 역사를 다시 세우고자 시민단체와 33유족회와 광복회가 함께 삼일공원정비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충북인들의 뜻을 받들어 삼일공원을 정비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청주시가 주관하고 국가보훈처가 지원하여 겨레를 위하여 일어선 충북 민중들의 정신을 담은 횃불모양의 조형물을 만들고 부조를 새기는 한편 기단을 고치고 반원형의 형상으로 우주의 이치가 태극에 깃들도록 정비하였다.

세계사에서도 의미가 있는 3․1운동은 자주 평등 자유의 정신을 담고 있으며 그 거룩한 정신은 반전평화와 민족통일로 이어지고 그 높은 사상은 홍익인간과 생명존중으로 나아간다.

순국선열의 영혼이 우리를 일깨우는 이곳에 그 중수의 기록을 남긴다.

   2010년 3월 1일 

3․1공원정비추진위원회




충북지역의 3·1운동 

3·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하여 통치하는 동안 일어난 최대의 민족독립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50일 가까이 각계각층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여 서울과 지방은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 미주 등 국내외적으로 확대된 20세기 한국민족독립운동의 분수령이었다.

이러한 3․1운동을 촉발시킨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석구 신홍식 정춘수(후에 변절) 6인이 충북출신인 점은 충북인의 크나큰 자랑이다.

충북지역의 3․1운동은 3월 2일 독립선언서가 청주에 배포되어 여러 차례 시위를 꾀하였으나 사전 발각되는 등 일본관헌에 의해 저지되다가 3월 19일 괴산읍 장터에서 홍명희 등의 주도로 본격적인 만세시위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4월 19일 제천 송학 시위까지 만세함성이 그치지 않았다. 당시 충북지역의 시위는 경기지역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충북의 만세시위는 사람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장날에 주로 이루어졌다. 시장이나 관공서 주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일본관헌의 체포 연행에 맞서 낫 곡괭이 몽둥이 돌멩이 등을 들고 경찰주재소나 면사무소를 습격 파괴하는 등 강압적인 식민통치와 무력진압에 격렬히 대항하였다.

충북지역의 3․1만세운동은 유학자와 젊은 농민과 학생층의 주도와 참여가 두드러졌다. 특히 충북은 낮의 시위뿐 아니라 밤에도 횃불만세라는 독특한 시위를 전개하여 일본군경의 무력진압에 직접 맞서기 어려운 노약자들까지 호응하였다. 남녀노소가 밤에 주변 산위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거나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횃불만세운동은 인근 충남, 강원, 경기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충북의 3․1운동은 도내전역에서 50여 차례 수 만 명의 민중이 참여하여 수 백 명의 인명피해를 냈지만 1910년대 후반 의기소침하던 의병운동의 맥을 살려 새로운 민족독립운동의 깃발을 올리면서 1920~30년대 한국민족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3․1운동을 촉발시킨 것은 민족대표 33인이었지만 이 운동을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승화시켜 세계의 이목을 집중케 한 것은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이 땅의 민중들이었다.  

2010. 3. 1 

3․1공원정비추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