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동안 청주 한센인들을 위한
목회를 펼친, 정상구 목사
'소록도'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한센병을 떠올린다. 한센인들이 소록도에만 있는 줄 알고 지냈다. 청주에도 한센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을 대부분 모른다. 우리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살아오는 동안에도 한센인들 옆에서 25년 동안 함께 생활해온 분이 있다. 바로 소망교회 '정상구' 목사와 '장은주' 사모이다. 소외된 이웃을 위해 우리 사회는 큰 짐을 지고 있다. 우리는 어느 한 사람도 소외 없이 당당하게 사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임을 알고, 그런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한평생 한센인을 위해 목회를 펼친 '정상구' 목사님을 '길 위의 재봉이'가 만나, 깊이 있고 좋은 이야기를 들으며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일시: 4월 12일 오후 3시
장소 : 내수읍 원통리 소망교회
▪ 송재봉 : 제가 지금 오면서 목사님 얘기를 들으니 반성을 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시장을 하겠다고 나왔었는데, 여기도 한 번 와보지 않고, 이렇게 터를 잡고 사시는 주민이 계신 것도 모르고 선거를 치렀다니 참 죄송하기만 합니다. 오늘도 여기 왔지만 사실 잘 모르기도 합니다. 목사님이 굉장히 의미 있는 일들을 해오신 거 같아 오늘 여러 질문을 하면서 많이 배우려고 합니다. 우선 목사님도 신학교를 마치며 목회할 자리를 잡을 때, 여러 선택지가 있으셨을텐데 한센인들을 위한 목회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정상구 목사 : 제가 1999년도에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목회를 준비하는 가운데 목회할 교회를 찾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현실적인 여건이 되는 교회, 재정 자립도 되고, 또 성도들도 어느 정도 있는 교회를 찾으려 했고, 몇 군데에서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어요. 그런데 청빙 서류를 제출한 교회마다 서류는 통과되었는데, 마지막 면접에서 계속 떨어지는 거예요. 목회 나갈 때가 됐는데 계속 떨어지니 이게 무슨 뜻이 있을까 싶어, 그때 한 달 정도 기간을 정해놓고 ‘하나님 원하시는 자리로 가기를 원합니다’ 기도하며 목회지를 놓고 작정기도라는 것을 했어요. 그때는 결혼도 하지 않았을 때라, 결혼과 목회지를 놓고 함께 기도했는데 끝날 때쯤, 여기 소망교회 전임 목사님이 제 학교 선배셨는데 연락이 왔어요. 내 후임으로 여기 와서 헌신하고 봉사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하셨어요.
사실 제가 대학 3학년 때 신학교 동아리 몇몇 친구들과 농촌 봉사활동을 여기로 왔었어요. 그때 저도 한센인들을 처음 만난 거죠. 예배를 같이 드리다가 그분들의 얼굴을 봤는데 진짜 놀랐어요. 얼굴이 뭉개지고, 손 마디도 없고, 코도 없어지고… 너무 놀라고 충격을 엄청나게 받았어요. 사실 그때는 저도 한센인들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고, 농촌 봉사활동하고 돌아가는데, 하나님이 감동으로 그런 마음을 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너의 목회는 진짜 세상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분들하고 함께 하는 목회를 했으면 좋겠다’ 하는 감동이 막 밀려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때 결단을 좀 했었어요.
졸업을 앞두고 목회지를 나가려고 여러 군데 자리를 알아보는데, 이상하게 잘 됐던 곳도 막히고, 작정기도 끝날 때쯤에 선배 목사님한테 전화가 온 것이지요. 여기로 와라. 네가 와서 내 뒤를 이어서 충성해라. 그 전에 농촌 봉사활동하다가 하나님이 주였던 감동이 다시 임하면서 ‘아! 하나님이 내 자를 미리 예비해 놓으셨구나!’ 그래서 제가 바로 1999년 2월에 남일면 은행리에 있던 교회로 부임을 해서 지금까지 있는 거죠. 청춘을 여기다 다 쏟아부은 거죠.
▪ 송재봉 : 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사모님도 여기 내려오시기로 결단하기 까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요.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지 말씀해 주시죠?
▶ 정상구 목사 : 저희가 1999년 5월에 결혼하였습니다. 식구가 사는 곳은 부천이었는데, 여기 오기 전에 잠깐 만났었습니다. 잘 알지는 못했지만 제가 이제 청주로 내려가야 되니까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이 사람을 혹시 나한테 짝지어 주신 건 아닌가 싶어, 내가 부평에서 어렵게 시간을 내서 집사람을 불러내 고백을 했죠. 그런데 그때는 집사람이 안 받아줬어요. 대답이 없는 거여요.
그래서 아닌가 보다 하고 청주로 내려왔는데 3월 1일, 제 생일날 전화가 왔어요. 생일날 한번 오고 싶다고 전화가 온 거예요. 정말 버스 타고 내려왔어요. 장미꽃 백 송이를 들고 청주까지 내려왔어요. 제가 그때 초보운전이었는데, 속리산으로 데리고 가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를 했죠.
▪ 송재봉 : 그때는 사모님이 이미 마음을 먹고 내려오신 것 같네요, 그렇죠?
▶ 정상구 목사 : 그래서 이 사람도 마음이 있구나 싶었어요. 바로 결혼해서 터를 잡았는데 저보다 이 사람이 더 적응을 잘하더라고요. 먹는 것도 성도들하고 같이 먹고, 가서 얘기하는 것도 이 사람이 더 잘하더라고요. 하나님이 진짜 예비하신 거라 믿어요. 그렇게 해서 여기서 목회가 시작된 겁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올 줄 몰랐죠.
▶ 장은주 사모 : 저희가 살던 환경이 시골이어서, 소 키우고 돼지 키우던 환경이 낯설지 않았어요.
▪ 송재봉 : 오셨을 때 여러 가지 조건이 좋지 않고, 목회하면서 교회를 유지할 수 있는 형편과 여건이 안 됐을 것 같은데 어떠했나요?정
▶ 정상구 목사 : 돼지를 가정마다 먹였어요. 집집마다 한 20마리, 30마리씩 키웠는데, 축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집 옆에 붙어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파리도 엄청 많았고… 성도님들이 생계를 따로 할 수가 없으니 이원종 도지사님 때 돼지를 가정마다 이제 한 20마리, 30마리씩 분양해 주셨어요. 구제역도 몇 번 와 파탄 나기도 했었어요.
생활하는데 교회적으로는 사실 미자립이죠. 성도들의 헌금만으로 교회를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습니다. 전도사 때 제가 왔는데, 처음 3년은 그냥 어쩔 수 없더라고요. 어떻게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수입은 없고 어디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선배님들이나 아는 지인분들한테 조금 도와달라고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목사 인수받으니까 계속 손 벌리기도 뭐해서 그때 결단했습니다. 도와달라는 얘기를 안 해도 하나님이 감동으로 누구를 통해서 주시면, 하나님이 주시는 걸로 알고 기쁨으로 받겠다고요. 그때부터 다른 사람한테 손 벌리지 않고 살아왔어요. 실제로 지원받던 것은 3년 정도 지나니까 다 끊어졌어요.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넉넉하진 않아도 살아온 거죠.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대로 살아온 거죠.
교회도 미자립이었고, 수입도 없고,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어요.
하나님이 공급해 주는 대로 살아왔죠.
▪ 송재봉 : 아이들을 네 명이나 두셨는데, 아이 중에 목사님의 뒤를 이어 목회를 하겠다는 아이가 있나요?
▶ 정상구 목사 : 다 안 하려고 해요. (ㅎㅎ) 제가 목회자로 잘 못 살았나 봐요. 첫째가 간호사 지망생인데, 아이들이 모두 되게 현실적이에요. 우리가 현실적으로 이렇게 어렵게 사니까, 빨리 돈 벌 수 있는 걸 찾으려 하고 목회는 안 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막내가 고3인데, 심리학을 전공하려 공부하고 있고 목회에도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심리학 나와서 선교사 쪽도 관심이 있고 그래서 얘가 좀 가능성이 조금 있습니다. 잘 키우고 있습니다.송
▪ 송재봉 : 제가 정말 잘 몰라서 그러는데, 한센인들이 현재 여기서 몇 명 정도 같이 생활하고 있나요?
▶ 정상구 목사 : 제가 여기 올 때 1999년도에는 그분들의 나이가 60대 초반 정도셨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25년 정도 지났으니까 85세 정도 되셨지요. 그 사이 합병으로 많이 돌아가시기도 하고, 나이 드신 한센인 성도님들은 대부분 요양원이나 소록도로 가시고 자제분들만 네 가정 정도 남아 있어요.
지금은 이제 한센병이 한국 사회에서 드물죠. 1945년 해방 이후에는 한센병의 치료 약이 개발됐거든요.* 1945년 해방 이전에 발병하신 분들이 상처가 많이 남아 있는 분들이에요. 그러니까 70~80대 정도 되신 분들은 얼굴이나 손이나 발이나 흔적이 그대로 남아 계신 분들이고, 그 자제들은 약이 개발돼서 50~60대는 흔적이 거의 없습니다. 한센병은 유전되는 병은 아니에요. 지금 잘못 알고 있는 거여요. 저희가 같이 살았잖아요. 대부분 유전되거나 가까이 있으면 옮는 병이라 알고 있었잖아요. 남일면 은행리에서 여기 내수 원통리로 돌아왔을 때 주변 분들이 굉장히 거부감이 크셨어요. 저에게 전화해서 마을에는 들어오지 말게 해달라고 전화 오기도 하고, 이게 유전되거나 옮는 병이 아니라 말씀드려도 선입견을 갖고 계시니까 잘 믿지 않더라고요.
* 1945년 광복 이후 디디 에스제의 도입으로 음전환된 환자가 증가하자 이제 한센병은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그 결과 1963년 「전염병예방법」이 개정되면서 한센병환자 강제 격리정책 조항이 삭제되었다.
한센병은 이제 옮기거나 유전되는 병이 아니에요
처음 여기로 이주 왔을 때는 편견이 아직 남아있었어요
▪ 송재봉 : 그러면 지금은 한센인을 대상으로 한 목회 자체가 한계가 온 상황이네요. 그래서 내수에서 작은도서관도 해보려 했던 것인가요?
▶ 정상구 목사 : 예, 저도 목회적으로 새로운 대안들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쉽지는 않아요. 여기 이 터 위에 교회가 세워져서 주변하고 관계성들은 단절이 되어 있고, 전도지 들고 몇 번 나갔는데 어렵습니다.
몇 년 전에 저희가 작은 도서관을 내수 쪽에 열어서, 교회는 한센인 성도들을 위한 목회를 하고 도서관에서는 새롭게 문화사역이나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하면서 마을 주민과 소통하고 새롭게 만들어가려고 했던 거죠. 그런데 2년 정도 지났을 때 코로나가 왔어요. 계약이 딱 끝나는 날이었어요. 월세를 더 올려달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감당할 수가 없는 거예요. 고민을 많이 하다가 '죄송합니다. 저희는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하고 나왔죠.
얼마 있다가 집주인한테 전화가 왔어요. '하나님이 목사님을 너무너무 사랑하시는 것 같다'고 말씀하더라고요. 코로나가 왔잖아요. 월세 50만원을 내면서 3년 계약을 했으면 코로나로 인해 도서관 문을 열지 못해 더 고민이 많았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코로나 때는 도서관 같이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은 열지도 못 하게 했잖아요. 그래서 도서관을 교회로 옮겨서 해보려고 하는데 여의치가 않아요. 여기서 여러 모임도 가지려 하는데, 녹록지만은 않아요.
▪ 송재봉 : 지금은 일단 목회 자체가 한센인을 대상으로 할 수는 없는 상태고 그러면 교회 공간은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려고 생각하시나요?
▶ 정상구 목사 : 저희 공간은 그냥 열린 공간으로 운영하기를 원하는데 그렇게 활발하지 않아요. 누구든지 여기서 열 명 정도 모이는 게 가능하잖아요. 저와 집사람이 자살예방 활동을 하고 있어요. 캠페인도 하고 교육도 하는 자살예방센터 청주 지회가 만들어졌어요. 지부 사무실은 오송에 있는데 제가 대표로 있어요.
저희 성도님들을 위한 사역은 지금 25년 동안 했잖아요. 이전에 했던 사역들은 저희 성도님들을 위한 사역이었지만, 이제 한계가 왔고 자살 예방활동과 사랑의 반찬나누기 같은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어요.
사랑의 반찬나누기 활동은 청주 오송, 오창, 옥산 등 80가정 독거노인들을 돕는 활동인데, 이 사역이 우리 교회로부터 시작되었어요. 처음에는 우리 교회 성도들을 위해 10가정 정도만 반찬을 나누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시작했어요. 그러다 감리교 연회에서 사역을 좀 더 확대해서 청주 지역에 있는 홀로 사는 노인분들한테도 혜택을 드렸으면 좋겠다고 해서, 2007년 11월부터 18년 넘게 이어오고 있어요. 저는 어떤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지는 않아요. 단, 하나님이 어떤 사인을 주시면 그 때 시작합니다.
▪ 송재봉 : 지금은 말씀해 주신 것 외에 특별한 사인을 주셔서 하고 계신 일이 없나요?
▶ 정상구 목사 : 지금도 아주 많은 사역을 하고 있어요. 타일선교회 활동도 하고 있어요. 이것도 계획해서 만든 게 아니에요. 우리 지방회 목사님 중에 타일 전문가가 있어요. 타일 시공을 직접 하시는 분인데 저희 지역으로 오신 거예요. 어느 날 도서관에 있는데, '목사님 한 번 찾아뵙고 싶다'고 전화가 왔어요. 안면도 없고, 학교도 다르고 저한테 전화할 이유가 없는데, 갑자기 전화를 해서 도서관을 찾아온 거예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이분이 수재더라고요. 미국에서 목회하다가 어떤 특별한 사건이 벌어져 한국으로 오게 된 거예요. 한국에 왔는데 일자리가 없으니까, 인력사무소 전전하다가 타일을 배워 타일 전문가가 됐어요.
이 분과 교류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하나님께 영광으로 돌리며 사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 모여 타일선교회를 만들었어요. 지역 교회, 특히 농어촌교회의 환경, 화장실이 참 열악해요. 제가 금요일에 가서 (타일을) 철거하고 붙일 수 있게 준비해놓으면 그 분이 토요일에 와서 타일을 붙여요. 그럼 제가 마지막에 매지를 넣고 마무리하지요. 굳이 홍보하고 진행하지는 않고요. 그냥 여기 저기 교회 소식을 들으면 저희가 문의해서 찾아뵙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지원하고 있죠.
한센인 선교에 한계가 와서
지금은 지역사회를 위한 선교활동을 하고 있어요
▪ 송재봉 : 동네 얘기 좀 여쭤보고 싶은데요. 그러면 여기 어쨌든 한 200평씩인가 불하를 받아서 들어오셨는데, 한센인들은 거의 다 돌아가셨고. 이 터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 정상구 목사 : 터는 원래는 서울에 있는 한센인 협회 소유로 되어 있고, 그 쪽에서 개인적으로 등기이전을 안 해주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예전에 한센인 협회 회장님이 저희에게 땅을 주시기로 구두로 약속하고, 이 곳으로 이주를 추진한 거예요. 그런데 그 분이 사건이 생겨 회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분이 회장이 되셨는데 계속 등기를 이전하지 않고 있어요. 사실 200평씩 땅도 다 나누어져 있는 상태에요. 저희가 몇 번 서울에 올라가서 얘기도 했는데, 현재 구두로 했던 약속이 흐지부지되고 그냥 사시는 데까지 살라고 합니다. 저희도 원래 나눠주기로 한 건데 아직 등기 이전해 주지 않고 있어요
▪ 송재봉 : 여기를 주민의 뜻과 다르게 개발을 하는 그런 상황이 올 수도 있겠네요?
▶ 정상구 목사 : 그 분들이 만약에 여기서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잖아요. 내 땅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건물을 지었잖아요. 이 건물값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는데…. 제가 볼 때는 자손들에게 땅은 안 넘겨주고 그냥 사는 것 정도는 허용하겠다는 것 같아요.
▪ 송재봉 : 여기 마을의 규모가 얼마나 되나요?
▶ 정상구 목사 : 전체가 4,400평이라고 들었어요. 저기 들어오는 입구부터 이 뒤쪽까지요. 지금 여기 고물상이 많이 들어와 있어요. 마을 분들이 농사를 못 짓고 자립이 안 되고, 예전에 돼지라도 키웠는데 지금은 못 하잖아요. 그러니까 고물상을 내주고 세수입을 받는 거지요. 세를 받아서 마을 자금으로 쓰고 있기도 해요.송
▪ 송재봉 : 마을이라고 하면 어디를 얘기하는 건가요?
▶ 정상구 목사 : 여기가 지금 청원 농장이라고 불러요. 한센인 협회 농장 가운데 청원 농장이 여기에요. 그래서 저희 마을 이름이 청원 농장이에요
▪ 송재봉 : 과거에는 주로 돼지를 키워서 그걸 수입으로 했던 건데, 여기 와서는 무엇을 주로 재배하고 있죠?
▶ 정상구 목사 : 지금 그냥 밭농사를 주로 하는데 농산물을 팔 정도는 아니고요. 대개 자급자족하고 있죠. 땅이 법적으로는 소유가 아니지만, 어차피 구획은 나눠놨으니까 그 땅에다가 뭐라도 심어서 거둬 먹고 있어요. 소 키우시는 분이 두 분 정도 계시지만 수입원이 따로 없고 생활이 어려워요.
▪ 송재봉 : 그러면 지금 목사님 아이들은 다 큰 건가요?
▶ 정상구 목사 : 지금 고3이 막내니까 많이 컸어요. 대학생도 있고, 첫째가 이제 3학년이니까 둘째, 셋째는 줄줄이 군대 가 있습니다.박
▪ 송재봉 : 앞으로 계획은 생각하신 적이 없다고 하시긴 했는데 그래도 장차 뭔가 해보고 싶은 것이나 하시려고 하는 게 있나요?
▶ 정상구 목사 : 아직 뚜렷이 보이는 건 없습니다. 기도는 하고 있지만 보이는 건 없고 개인적으로 비전은 예수 마을 공동체를 하고 싶어요. 기독교적 가치로 마을을 만들어, 집 없는 분들과 함께 살고 싶어요. 서울이나 감리교 큰 교회와 함께 한 교회 한 가정 짓기 프로젝트를 추진해 터를 마련해 집을 지어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갈 수 있는 마을을 만들고 싶어요. 10호든 20호든 만들어서 함께 그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요.
이 마을에서 자립을 할 수 있도록 만들고, 누가 봐도 예쁘고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어서 누구든 평일에 놀러 올 수 있게 했으면 좋겠어요. 한 세대가 보통 아이 한두 명과 함께 살 수 있는 규모의 집을 짓되, 그냥 조립식으로 서둘러 짓지 말고 진짜 예쁜 집을 지었으면 좋겠어요. 아주 예쁘게 짓고 주변 환경도 아름답게 꾸며서, 청주 가볼 만한 곳 검색하면 여기 아름다운 마을, 아름다운 공동체가 나오면 좋을 것 같아요. 그게 꿈이긴 한데 모르겠어요. 주님이 하셔야지요.
▪ 송재봉 : 사모님은 지역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시나요?
▶ 장은주 사모 : 요즘에 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자살 예방이나 진로 교육도 하고 있습니다.정
▪ 송재봉 : 이제 늘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네요?
▶ 정상구 목사 : 그렇죠. 뭐 그냥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대로 저희는 봉사하고 선교하며 하나님이 사인을 주시는 만큼 하려고 해요. 지금까지 다 그랬어요. 내가 하려고 한 게 아니에요.
장기적으로 집없는 분들과 함께 마을을 만들고 살아가는
예수마을공동체를 꿈꾸고 있어요
▪ 송재봉 : 이렇게 교회를 통해서 어려운 분들을 돕는 일을 하면서 제일 어려우셨던 때는 언제셨나요? 정
▶ 정상구 목사 : 예전에 마을이 남일면 은행리에 있을 때 면사무소에서 쌀하고 생필품 지원이 나왔어요. 그때 우리 애가 어리고 생활이 참 어려웠는데 면사무소에서 영유아 사업 지원이라고 쌀과 식료품이 왔을 때 참 많이 울었죠.
그런데 저희 같은 목회자들은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재산도 마찬가지에요. 재산 없이 사는 게 맞아요. 구약의 레위인들 한테는 하나님이 기업을 안 주셨거든요. 내가 너의 기업이 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목회자가 재산이 없이 사는 게 성경적으로 맞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 재산이 들어오면 재단에 올려놓잖아요. 그래야 목회자도 자유롭고 성도들도 자유로워요.
재산은 없이 사는 게 맞는데 요즘은 그래도 뭐라도 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솔직히 더 절절하게 들어요. 여기 땅 200평씩 나눠주겠다고 그랬을 때, 그거라도 있다면 좋겠다고 나름 기대를 하기도 했지요. 솔직히 현실적으로 보면 저는 실패한 목회자라는 생각도 들어요. 교회도 아직 자립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 송재봉 : 그래도 교회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교회에서 한 끼라도 제대로 먹고 그렇게 살아오셨겠지요. 목사님은 재산이 전혀 없으신가요?
▶ 정상구 목사 : 없습니다. 저희가 차상위 계층입니다. 자랑할 건 아니지만, 주 안에서 자랑하는 거예요.박
▪ 송재봉 :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셨네요. 애들은 성장 과정에서 여기서 살면서 이렇게 하는 거에 대해서 불만은 없었나요?
▶ 정상구 목사 : 그냥 주님이 허락하신 것만으로 그냥 만족하며 살아왔어요. 글쎄 애들도 불만이 있겠죠. 애들이 아직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현실에 급급하고 엄마 아빠의 형편과 상황을 아니까 용돈 더 달라는 것도 굉장히 눈치 보고 얘기하고, 스스로 벌어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어쩔 수 없어요. 현실적인 문제가 걔네는 가장 큰 고민인 거죠. 그런데 그건 네 삶이고 어쩔 수 없다. 아빠는 아빠가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아서 해야 할 아빠의 삶이 있고, 너희들 인생은 너희 인생이다.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잘 못해주는 거에 대해서는 좀 미안하고 그런 마음이 있지만 그렇다고 없는 걸 내가 어떻게 도둑질해서 만들어 줄 수는 없잖아요. 우리는 자꾸 얘네가 믿음 생활을 잘하기를 원하는데 아직 저희와 생각은 많이 다른 것 같아요.송
▪ 송재봉 : 오랜 시간 어려움이 참 많으셨을 텐데, 그럼에도 원칙을 잘 지키며 사셨네요?
▶ 정상구 목사 : 부족하지만 그렇게 살려고 해요. 그렇게 깨닫게 하시니까 그렇게 살려고 해요. 그래도 내 안에는 약간의 걱정도 있어요. 왜 없겠어요. '은퇴하면 어떻게 살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솔직한 심정으로 아무것도 없잖아요. 어디 가서 시골집이라도 한 채 얻을 만한 돈도 없으니까요. 그래도 단순하게 말하면 그냥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주님이 허락하신 만큼만 살아야지. 집이 없으면 없는데로 살아야지 하는 마음을 다지곤 합니다
▪ 송재봉 : 목회를 해오시는 과정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 같기도 한데요?
▶ 정상구 목사 : 목회는 사명이니까 이 길로 들어섰는데, 이 길을 오면서 몇 번 자리를 바꿀 수 있던 상황이 있었어요. 세 번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옮기면 현실적으로 더 나아질 수도 있었겠죠. 사명이라는 게 저를 부르신 자리가 중요함에도, 교회를 옮기고 어수선할 때 아니면 마을에서 데모하고 그럴 때 연락이 왔었어요. 강화도에 목회지가 하나 났을 때, 동기들은 제가 어려운 걸 아니까 '이제 바꿀 때도 되지 않았냐', '너 거기서 한 10년 정도 했으니까 옮겨라'라며 적극 말했어요. 또 한 번은 최근 여수에 있는 교회가 반듯하고 여건도 다 되는 교회여서 동기가 본인이 자리를 이동할 상황이라며 오라고 그랬는데.. 그때도 마찬가지였어요. 하나님 사명보다 현실에 앞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그 자리들이) 내 자리가 아니라는 믿음에 가지 않았어요.
▪ 송재봉 : 그때 정도면 여기에 한센인들도 거의 없는 상황이라 내려놓고 가셔도 크게 문젯거리가 되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정
▶ 정상구 목사 : 하나님이 제게 처음에 주신 그 사명. 이분들을 놓고 제가 서원(약속)한 게 있어요. 한 생명, 한 분이라도 하나님이 내게 맡긴 사역이거든요. 그러니까 제 목회의 중심은 한센인, 이분들을 향한 헌신이고, 봉사고, 희생이라고 다시 깨달았어요. 아직 돌아가시지 않은 분들 있잖아요. 물론 병원에 계시지만 마지막 한 분까지 하나님 나라로 올려드리는 것이 제 몫이고, 그게 하나님 앞에 제가 약속했던 서원이라 그것을 저버리고, 내려놓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한센인 한 생명, 한 분까지 제가 돌봐드리는게 사명이에요
다른 곳으로 옮길수도 있었지만 가지 않았어요
정▪ 송재봉 : 그러셨군요. 좀 약간 다른 얘기지만 목사님이 보실 때 요즘 정치인들 보며 어떤 생각이 드세요?
▶ 정상구 목사 : 정치해야죠. 정치는 다 참여해야 하는 게 맞기는 하는데, 저는 정치가 어떤 면에서 보면 많은 표를 얻어야만 설 수 있는 자리이긴 하지만, 표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죄송하지만, (사람을) 만나고 다닌다고 표가 나한테 오는 건 아니라고 봐요. 어떤 면에서는 감동을 줄 수 있는 분이 되어야 해요. 그럼 이 사회에서 감동을 줄 수 있는 정치인이 누군가 보면, 낮은 곳을 찾아다니시는 분이라고 생각해요.
10명한테 얼굴을 알리고 하는 것보다도 그 분이 평상시에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을 향해 펼쳐내는 조그맣고 잔잔한 감동의 마음을 '내'가 가졌다면 평생 변심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이런 감동을 주는 정치인이 드물어진 것 같아요. 그 감동이 결국은 100표, 1,000표를 더 능가할 수 있는 표가 될 수 있다고 봐요. 중요한 건 세상 가운데서 소외된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심으로 만나야 해요. 그 분에게 무엇을 줘서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이 되어준다면, 어려운 사회 속에서 그런 마음을 주변에 있는 분들이 안다면, 저는 평생이라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봐요.
▪ 송재봉 : 말씀 중에 여러 명을 쫓아다닌다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정말 한 분의 마음을 제대로 얻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이지요? 정
▶ 정상구 목사 : 그런 감동의 마음을 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 분을 다른 걸로 평가 안 해요. 저 사람이 얼마나 말을 잘하냐는 것으로 평가를 하지 않고, 저 사람이 얼마나 따뜻한가를 보는 거죠. 이분이 이렇게 왔는데 이렇게 와서 격려해주는데 그때 위로가 되고 그 힘이 됐다. 그러면 그 소문이 주변 분들에게 나지 않겠어요. 그러면 그 분에 대한 이미지가 평생을 간다고 봐요.
선거할 때만 열심히 인사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진짜 그런 역할들을 쭉 하시면, 감동을 받은 분들은 저는 변하지 않는다고 봐요. 그 분이 어려울 때 와서 이렇게 위로하고 이렇게 했더라 그 얘기 한 번 들으면 당연히 그분한테 가는 거지요. 목회자들도 비슷해요. 평상시에 잘 섬기고 어려운 목회자들 돕고, 또 작은 교회에 가서 힘과 위로를 주고 하시면 표 찍으라고 하지 않아도 그분 찍어요.
저는 정치가 능력과 학벌로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진짜 실질적으로 사람들하고 만나 소통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아름답게 베풀어 나가고 펼쳐나가면, 좋은 기억과 감동으로 정치인을 새롭게 볼 것 같아요.
정치인들이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보다
한 사람, 한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정치를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믿음이 오래 갈 거예요
▪ 송재봉 : 목사님의 사역을 돕느라 사모님이 훨씬 많이 힘드셨을 것 같아요. 지난 세월을 버틴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 장은주 사모 : 신앙의 힘이죠. 올바른 마음과 믿음이 있잖아요.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고, 어쨌든 이 길을 걸어가기로 작정한 이상 저도 어렵지만 세상 사람들이 가는 똑같은 방향으로 안 갔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으니까요. 송
▪ 송재봉 : 저도 되돌아보면 제 식구와 학생 운동하면서부터 제가 몇 번 구속될 때 계속 뒷바라지해 주고, 함께 해서 결혼을 했어요. 그러니까 정치적으로도 동지이기도 하고 했거든요. 졸업 후에도 시민운동을 했으니까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적이 없었는데, 둘째 아이 낳고 그냥 정말 집에 돈이 하나도 없는 거여요. 집에 앉아 있는데 눈물이 나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좋은 세상, 정의고 뭐고 해도 내가 당장 내 새끼가 굶을 것 같은 상황인데, 이러고 살아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우리 식구하고도 사이가 안 좋아지고 서로 짜증도 나고 해서 헤어질 뻔했어요. 그 과정을 이렇게 견뎌내는 건 굉장히 좀 어렵긴 하더라고요.
그래도 터를 잡았던 곳이나 주변에서 함께 살 수 있는 그런 방법이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아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곧 행복한 노후를 준비하는 것 같아요.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제가 그냥 목사님이 좋아졌습니다.
시민단체의 활동가들도 사실 비슷해요. 급여가 많은 것도 아니고 활동가로 사는 것과 미래에 대해 저도 고민이 많이 됐었죠. 제가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오랫동안 하다가 엔지오센터 만들어서 거기서 한 6년 간 일을 했어요. 그때 제일 고민이었던 것이 '늙으면 어디 가서 살지'였어요. 연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공동체, 공동으로 문제를 풀 수 있는 해법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저도 굉장히 많았어요. 왜냐하면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그런 꿈을 꾸고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면 길이 열러지 않을까 해요. 그러면서도 결국은 작은 규모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하고, 그걸 넘어서서 지역사회가 협력할 수 있는 도시를 만들어가는 것도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목사님은 청주에서 태어나서 쭉 여기서 사신 건가요?
▶ 정상구 : 그건 아니고요. 저는 부천에서 살다가 99년도에 청주로 내려왔으니 여기 연고가 전혀 없는 곳이에요.
▪ 송재봉 : 마지막으로 청주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데요. 사시면서 청주라는 도시가 어떠셨던가요?
▶ 정상구 목사 : 청주 진짜 살기 좋지요. 일단 자연재해가 거의 없잖아요. 제가 어렸을 때 어디 살았냐 하면요. 지금은 서울이지만 광명 철산리에 살았어요. 거기가 매년 물난리 났던 곳입니다. 여름만 되면 물이 잠겨서 어렸을 때 옥상에서 구조되어 헬기도 몇 번 타봤어요.
청주는 지리적인 조건도 좋잖아요. 여기가 우리 대한민국의 중간 정도 되잖아요. 도로적인 입지도 굉장히 좋고, 교통도 좋은 편이에요. 그래서 다 연결되어 있잖아요. 서울, 부산, 서해안, 동해안 어디든 갈 수 있잖아요. 시민의 성향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만은 신앙적으로 판단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많이 닫혀 있는 것 같아요. 정서들이 많이 달라지기도 했고 개인주의가 심해지니까 관계 맺기가 참 어려워요.
좋은 뜻을 가지고 뭘 하려고 하면 공유가 참 중요한데 한 마음 한 뜻이 잘 안 되어서 고민이 많죠. 공감도 안 되고 함께 참여하지도 않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동역자를 붙여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려면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하는데, 지금은 공동체 속에서 함께 모여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건 제가 볼 때 더 어려워진 것 같아요.
▪ 송재봉 : 오랜 시간 사모님과 함께 시간 내 주시고, 좋은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많이 배우고 겸손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신앙의 힘이죠. 올바른 마음과 믿음이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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