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노동인권센터, 우리 같은 단체가 필요없는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 인터뷰 : 안건수 소장(이주민노동인권센터)
** 장소 : 율량동 뿌리깊은 카페
▪ 송재봉 : 안녕하세요. 오늘은 우리 지역 이주민 노동자들의 든든한 형님이신 청주이주민노동인권센터 안건수 소장님을 만났습니다. 상식과 정의가 바로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한 평생 일관되게 노력하고 계신 안건수 소장님을 통해 인권의 가치, 다문화 국가로의 전환을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안소장님이 주력하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지키는 문제는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안건수 소장님과 함께 이주민 노동자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이주민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온 삶이 이제 꽤 되셨죠? 얼마나 되셨나요?
▶ 안건수 소장 : 제가 2003년 4월 9일부터 시작을 했으니까, 만 20년이 넘었죠.
▪ 송재봉 : 처음 이주민 노동운동을 하신다고 했을 때 기억이 나네요. 이주민 노동자 문제가 사실 어려운 일인데, 그 일을 하는 단체를 만들어서 조직이 흔들리지 않고 망하지 않고 잘 이끌고 갈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도 있었어요. 그런데 20년 동안 지속하면서 우리 지역을 넘어 전국에서도 제일 잘 운영되고 활동적인 권위있는 시민단체가 되는 걸 보면서, 소장님이 했을 노력과 고생이 생각나더라고요. 소장님께서는 특별히 이주민 노동자 문제에 천착하고 이 문제 해결에 인생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하신 계기가 있을까요?
▶ 안건수 소장 : 저는 모태신앙이에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다가 군대 갔다 오고 복학하기 전에 교회 연합회 장청이라고 있어요. 장청 충청도연합회에서 총무 역할을 하고 회장을 하면서 기독교가, 그리고 예수의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하는 시간들이 있었어요. 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교회일치운동, 환경 그리고 사회적 약자 등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내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었죠.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신협에 들어갔어요. 한 13-14년 정도 근무를 했죠. 2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까지 일을 하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으면서 꽤 오랜 시간 동안 근무를 했어요. 그러다가 90년도 중후반에 김태종 목사님과 10명 정도 같이 성서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면서 공부를 같이 했지요. 성서는 다 한자어로 되어 있는데, 우리 말로 바꾸는 게 쉬운 작업은 아니었어요.
그때 어떤 후배가 김태종 목사님을 찾아와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너무 힘들다고 하면서 목사님께 역할을 해주서야 되는 게 아닌지 질문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뒤풀이 자리에서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제가 그걸 해보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아내한테 물어봤죠.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 와서 차별을 받고 힘든 상황인데, 내가 어떤 역할을 해보면 어떻겠냐고요. 그런데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마음을 접었죠.
그리고 한 4-5년이 흐르고 2002년 11월 14일에 전국 14개 신협이 문을 닫는데, 우리 신협이 그 중 하나였던 거예요. 은행권은 닫아도 예금자들, 대출한 사람들을 정리를 해야 하잖아요. 그게 한 10년 정도 걸려요. 저는 그거는 내 역할이 아닌 거 같다고 하고 기회가 되면 나갈 거라고 했어요. 근데 사실 나와서 할 게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2003년 1월달에 문익환 목사님 추모제를 했어요. 제가 장청 선배들 모임 총무를 했을 때인데, 추모제 끝나고 뒤풀이에서 고은영 목사님이 충북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를 청주에 차렸는데 사무국장을 구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다고 했고, 한 달 정도 지나서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신협을 정리하고 2003년 4월 9일부터 첫 출근을 시작했죠. 아내한테는 1년만 하기로 했는데, 이게 한 20년 하게 된거죠.
2003년 4월 부터 이주민 운동을 시작했죠.
아내 한테 1년만 하기도 했는데, 이 일을 20년 이상 하게 된거죠.
▪ 송재봉 : 교회에서 성서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예수의 삶을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내적 고민이 있었던 거고, 그것이 외국인노동자가 우리 사회에서 어쩌면 가장 소외되고 고난받는 사람들이다라는 판단도 있었던 거네요. 저는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이주 노동자, 특히 미등록 체류 노동자들이 가장 열악한 골짜기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런 골짜기들이 차츰 메꿔지면서 우리 사회가 진일보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사회나 적어도 사람이 살만한 세상이 되려면 차별이 정당화되는 사회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사회는 여전히 외국인 노동자들을 좀 차별해도 괜찮다라는 생각이 내면에 있는 거 같아요. 그게 고용하는 기업인뿐 아니라 일반 시민 생각에도 있는 거 같아요. (외국인노동자 지원) 일을 하면서 그런 장벽 같은 거는 없었나요?
▶ 안건수 소장 : 처음에는 되게 심했죠. 저한테 ‘니가 한국 사람이냐, 외국인이냐’ 이러기도 하고, ‘매국노 새끼야’ 이런 얘기도 듣고 맞기도 했어요. 사실 처음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어떤 역할을 하는 지 자세하게는 모르고 참여한 거예요. 그러다 상담하고 참여하면서 보니, 엄청난 생각 차이가 있었고 차별화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더라고요.
제가 어릴 때 봤던 ‘수사반장’이나 ‘웃으면 복이 와요’ 이런 프로그램을 보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라는 말들을 우스갯소리로 했어요. 그리고 학교 선생님이 나중에는 돈이 우리를 지배할 세상이 올거다 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의 현실을 보니 맞더라고요. 그리고 우리랑 조금 다른 사람들은 차별하고 좀 빚깔 좋아보이면 존중하고 우러러 보는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고, 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지금의 우리 사회의 현실이라고 봐요. 이런 사회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거는 만나는 사람들한테 얘기를 하는 거죠. 우리 모두 똑같은 사람이다.
▪ 송재봉 :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야기죠. 차별을 정당화하지 않고,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로 가야 한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죠.
▶ 안건수 소장 : 저는 기독교인인데요. 언젠가부터 기독교인들이 차별을 얘기해요. 제가 작년에 대통령상 인권상을 받았어요. 일부에서는 왜 받았냐고 욕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이 주는 인권상이라고 해서 받고, 남선교회에 61년생, 62년생 모임이 있어요. 거기서 제가 상도 받았고 해서, 세계인권선언을 가지고 가서 함께 읽었어요. 그랬더니 한 분이 이걸 왜 읽어야되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1948년도에 인권 선언을 했고, 우리나라도 채택했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걸 읽고 모든 사람들이 인간임을 존중해야 되는 것이라고 말을 했어요. 그래도 왜 해야 하냐고 묻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고 있고, 그러니까 모든 다 평등해야 되는 게 맞는데 왜 기독교인들은 (성소수자들이) 나랑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해야 된다고 당연하게 여기는 지 이해가 안 가요. 상식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납득이 가질 않아요. 예수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쳤거든요. 저는 나와는 다른 사람을 차별해도 된다는 이거는 성서를 잘못 읽었고, 잘못 해석한 거라고 봐요. 어쨌든 먼저 배우고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이야기들을 계속 해주면서 깨쳐 나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바위에 물을 붓더라도 계속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소임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다 평등해야 되는 게 맞는데, 왜 기독교인들은
성수자들을 차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지 이해가 안 가요.
상식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납득이 가질 않아요.
▪ 송재봉 : 훌륭하십니다. 이주 노동자들을 지원하면서 대부분은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해결이 되었겠지만 가끔은 보람을 줬던 사례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 안건수 소장 : 제가 처음 했을 때인데요. 이름이 해피에요. 인도 리더였고요. 2003년도에 불법 체류자 관련 법을 만들어서 그들을 사면해준 적이 있어요. 그때 만난 친구인데, 제가 기억하기에 당시 최저임금이 한 6-70만원 정도 했어요. 근데 이 친구는 170만원을 받으면서 한 공장에서 7년을 근무했어요. 그 당시에는 엄청 큰 돈이죠. 이 친구가 인도를 갔다 온다고 했어요. 우리나라가 비자를 주기도 했지만, (비자를) 안 받고 갔다가 자진 출국한다고 하면 먼저 초청하겠다고 법무부가 약속을 한 거예요. 그러면서 사장님이 퇴직금을 주신다고 한 거예요. 근데 이 친구가 사장님이 워낙 잘해주셨기에 사장님의 선택에 맡긴다고 했어요.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 사장님이 다시 고용을 해서 대학교 가라고 하면서 등록금도 내주겠다고 했어요. 이런 얘기를 들으면, 이런 사람과 이런 회사만 있으면 저희 같은 단체가 필요 없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행복하죠. 그런데 잘 들리지는 않아요.
그리고 어떤 네팔 친구는 음성에서 일하다가 직장 변경 때문에 온 적이 있어요. 임금 체불로 해서 직장 변경을 도와줬어요.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저도 잊고 있었는데, 어느날 찾아오더라고요. 소장님 덕분에 한국에서 일 잘하고 퇴직금도 받고 간다면서요. 그러면서 10만원을 주고 가더라고요. 그 때는 눈물이 났어요.
▪ 송재봉 : 그렇죠. 저도 시민단체 일하면서 이런 저런 민원을 해결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문제가 해결되면 대부분 그냥 지니차고 말더라구요. 그런데 작은 도움에데 잊지 않고 기억애서 찾아와준 것만으로도 마음이 참 고맙죠. 보람도 배가되고요.
▶ 안건수 소장 : 대부분 직업 변경을 도와주면 가서 잘 살다가 떠나요. 저는 떠났는지 안 떠났는지도 모르죠. 그런데 이런 친구들을 만나면 뿌듯하고 행복하고 그래요.
▪ 송재봉 : 사무실에 보면 막도장이 큰 통에 한 가득 들어있잖아요. 그걸 보면서 이주민노동인권센터를 거쳐 간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안에 다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엄청난 일을 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죠.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계속 살든, 계속 살지 않든 한국에는 자신들의 억울함을 들어주고 함께 해결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하지 않을까 싶어요.
▶ 안건수 소장 : 지금도 동포들이 많이 와 계세요. 동포들은 본인들이 원하면 오랫동안 있을 수 있으니까, 한 번 상담을 하고 가서 친구들도 데려오기도 해요. 임금 못 받거나, 혼 나거나 욕 먹으면 여기로 오면 된다면서요. 여기 있는 도장은 전체의 일부라고 보면됩니다.
▪ 송재봉 : 힘은 들어도 보람도 있고 이일을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도 얻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앞으로 이 일 계속 하실 거잖아요.
▶ 안건수 소장 : 외국인 친구들이 그런 얘기를 해요. 소장님은 빨리 죽으면 안 된다고요. 제가 작년에 환갑이었는데 이 일을 누군가는 이어받았으면 좋겠어요. 특히 정부가 더 신경을 써서 민간인이 하는 것보다 더 풍성하게 운영했으면 해요. 제가 20년 동안 하고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지자체에서 무관심한 건 똑같아요. 다문화센터가 만들어지면서 역할을 일부 하지만, 그거는 한국에서 결혼하는 사람만 지원해주는 거잖아요. 사실 다문화가 그것만 있는 건 아닌데 다문화법이 만들어지면서 다문화를 그렇게 규정을 해버렸어요. 이주민들은 점차 늘어나는데, 오히려 더 소외시켜버리는 거죠. 빨리 바꿔야 해요. 이주민법을 만들거나 해야 하는데 하지 않죠.
제가 작년에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넣은 게 있어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전부 무상 교육이잖아요. 의무교육이자 무상교육이라 불법 체류자 자녀들이 교육을 받아도 무상이에요. 그런데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은 아니에요. 우리나라 법에는 무상으로 되어 있어요. 대통령령에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시행령이나 조례에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있지 아니한 자는 제외한다’라는 한 줄이 들어가 있어요. 단 난민은 제외라면서요. 그래서 제가 이거를 국가인권위에 상위법 위반이라고 진정서를 넣은 거예요. 올해 5월까지 권고해준다고 했는데, 아직도 통보는 못 받았어요.
▪ 송재봉 : 아이들에게 보편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를 빼앗는 건 문제가 있지요. 그건 개선해 나가야 할 숙제네요. 그래도 우리 사회의 인권 감수성이 높아지고 있어서 예전에 비해 기업주들의 임금체불이나 구타 혹은 감금과 같은 사례가 줄어드는 추세에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데 현장에서 체감하는 것은 어떤가요?
▶ 안건수 소장 : 잘 모르겠어요. 건수로만 보면 줄어들고는 있어요. 그런데 우리 단체를 몰라서 못 오시는 분들도 있을 거잖아요. 이주민들은 언어가 굉장히 중요한데, 저희가 통역을 다 담보하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상담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러다 보니 사회가 좋아져서 줄어드는 건지, 내 활동 영역이 줄어들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줄어들고는 있어요. 폭행 같은 경우에는 여전히 한 분기별로 한 건씩은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사업자들의 윤리 문제는 아직도 (개선되려면) 먼 거 같아요.ㅊ
법에는 초·중·고 교육을 무상으로 받게 되어 있는데, 시행령이나 조례에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있지 아니한 자는 제외한다’라는 한 줄이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불법체류자 자녀들은 혜택을 받지 못해요. 분명한 차별이지요
▪ 송재봉 : 그렇군요. 작년에 환갑 잔치를 했다고요? 가족들의 깜짝이벤트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는 소문도 있던데요.
▶ 안건수 소장 : 네, 작년에 아내랑 아들과 딸하고 환갑잔치를 했어요. 가족여행을 갔는데, 애들이 먹을 거도 준비해주고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나한테 차에 뭘 두고 왔으니 가져다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갔다 왔는데, 애들이 퍼포먼스를 해주더라고요. 돈 케이크를 난생 처음 받아봤어요. 같이 와인 한 잔 하면서 내 아들, 딸이 되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아들이랑 딸도 우리 아빠, 우리 엄마여서 너무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눈물도 흘리고 밤늦게까지 이야기하면서 보냈어요.
▪ 송재봉 : 지금까기 고생하면서 살아온 보람을 느끼셨을 거 같아요. 괜히 부러워지네요.
▶ 안건수 소장 : 제가 애들이 어릴 때 좀 때렸어요. 그런데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학생인권조례 만들자고 서명을 받으러 다니던 때였어요. 그때 애들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아빠도 우리 때렸잖아’라고요. 그때 정말 망치로 머리 한 대 맞은 느낌이었어요. 멍 했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사과를 했어요. 미안하다고요. 다시는 안 때리겠다고요. 그 이후로 완전 다른 사람이 됐어요. 저희도 아버지한테 많이 맞으면서 자라다 보니 당연하게 그렇게 된 거예요. 그래도 그 순간 제가 깨닫고 아이들한테 바로 사과를 하고 몇 년이 지나니 아이들이랑 친해지더라고요. 자기들이 있었던 일들을 편하게 이야기하면서 저는 완전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여동생한테 찾아갔어요. 제가 6남매 중 장남인데, 여동생을 많이 때렸어요. 그래서 바로 찾아가서 어릴 때 때려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어요. 그리고 찾아간 게 아버지예요. 왜 우리를 때렸냐고 물어봤어요. 그런데 기억이 안 난대요. 정말 짜증이 났죠. 그리고 돌아가셨으니까 화해하지 못했죠. 그게 참 아직도 남아 있어요.
▪ 송재봉 : 이주민들의 인권 문제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가정의 평화와 소통을 이뤄낸 측면도 있네요. 우리가 시민운동을 하면서 말로는 정말 굉장한 사회적 정의, 인권과 약자에 대한 배려, 사람의 존중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하는데, 일상을 살아가는 실제 삶 속에서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도 봐야 하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소장님은 이념과 삶을 일치시키면서 살아가시는 것 같아 존경스럽습니다. 저에게도 중요한 깨달음과 울림을 주는 거 같아요. 앞으로 우리 지역의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을까요?
▶ 안건수 소장 : 우리가 민주화를 외치고, 약자를 위한 삶을 보장하라고 외치는 와중에 누군가는 이야기해요. 형의 가족은 민주화가 됐느냐고요. 맞는 말이에요. 요즘에는 당연히 저도 아이들하고 소통하고 살아가면서 아이들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이렇게 부모랑 소통하는 집안이 별로 없다고요. 무시당하거나 혼내기만 하는데, 사실은 함께 고민하고 서로가 지지해줘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 아이들은 그래도 우리 집안은 민주화다라고 이야기를 해주는데, 그럴 때마다 행복하죠. 잘 커줘서 고맙기도 하고요. 그래서 활동가 후배들을 만나면 아까 말했던 아이들을 때리고 화해한 이야기들을 해줘요.
▪ 송재봉 : 모든 출발은 어떻게 보며 가족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거 같아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공장 앞과 학교 앞 그리고 집 대문에서 멈춘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사실 그걸 넘어서야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더 나아가 실질적 의미의 민주주의로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그걸 잘 실천해오신 거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 아이들은 우리 집안은 민주화되었다고 이야기를 해주는데,
그럴 때마다 행복하죠. 잘 커줘서 고맙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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