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청주를 차지하라! 삼국정립시대-부모산성, 와우산성, 상당산성 등 관방유적

송재봉 2010. 9. 15. 15:40

  충북참여연대는 청주의 역사와 문화를 시대별로 나누어 총 8회 기행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여행의 안내자는 오랫동안 지역향토사 연구를 해오신 충북참여연대 강태재 공동대표이다. 아래의 글은 매 기행때마다 직접 작성하는 청주역사의 정수를 정리한 원고이다. 혼자 보기 아까워 옮겨보았다.
  다음기행은 9월 25일 오전 9시 사무실에서 출발하여 
보살사-탑동오층석탑-목우사지석조여래입상 등을 답사할 예정이다. 청주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043-267-0151)



청주를 차지하라! 삼국정립시대
부모산성, 와우산성, 상당산성 등 관방유적


삼국시대에 청주지역에 처음 진출한 나라는 백제이다. 백제가 청주지역을 지배한 시기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기원 후 63년(다루왕 36)부터 (신라가 북진하여 청주지역에 진출하는) 6세기 중반 경으로 볼 수 있다. 한강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운 백제가 남하하면서 청주지역을 중요한 거점으로 삼았던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써, 교통의 요충지인 청주를 차지하기 위한 백제↔고구려↔신라간의 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됐고, 최종적으로 신라가 청주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우리고장은 관방(關防)유적이 유난히 발달하는 특성을 갖게 되었다.

백제의 수성, 고구려 남하, 신라의 북진

백제가 청주를 차지한 이후, 청주를 둘러싼 삼국간의 항쟁은 5세기후반 고구려의 남진으로 시작돼 청주지역을 중심으로 삼국 간 국운을 건 대립이 벌어지는데…, 한성백제를 멸망시킨 고구려는 국원성(충주)을 전초기지로 대전 월평산성과 청원 남성골산성을 축성하여 군사적 거점을 확보했다. 중원고구려비와 온달산성은 고구려의 남하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남한강 유역뿐만 아니라 금강 유역에 이르는 충청북도 일대가 모두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된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494년 고구려가 살수지원(薩水之原, 오늘날 청원군 미원면 추정)전투에서 신라를 밀어내는 등 청주지역을 차지한 고구려가 신라·백제를 상대로 전역을 넓혀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편, 신라는 5세기 후반부터 백두대간(소백산맥)을 넘어 한강·금강 유역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6세기 중엽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획득하여 고구려 세력을 몰아낸 신라는 다시 백제를 압박하여 금강 중상류지역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때 청주지역도 신라의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 판단된다. 신라는 보은 삼년산성을 전초기지로 하여 청주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서해안을 통한 중국으로의 지름길과, 백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청주는 금강 중상류 일대의 요충으로서 금강을 통해 백제의 수도인 웅진과 사비로 진출할 수 있으며, 진천~안성을 거쳐 서해안에 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 신라 진평왕 51년(629) 장군 용춘(龍春),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청주 인근에서 고구려 세력을 완전히 패퇴시켜 금강 중상류는 물론 한강 유역 전체의 지배권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676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청주의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하여 옛 백제지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고, 경주를 출발점으로 하는 교통로의 요충으로 청주에 서원소경을 설치, 운영하였다.

와우산성-부모산성-상당산성 등 관방유적의 보고

이처럼, 청주와 인근 지역의 확보는 남하하는 고구려나 북쪽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의 입장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충으로, 청주의 지정학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백제의 입장에서는 과거 가야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한강 수계(水系)의 회복을 위해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거점이었다. 청주지역을 차지한 신라가 축성(築城)을 통해 방어를 공고히 하고, 또 삼국통일 이후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여 옛 백제지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 했던 역사적 사실에서 청주가 갖는 확고한 역사적 위치를 알 수 있다.

 이 시기 관방시설을 보면, 백제는 웅진-사비를 방어하기 위한 동쪽 방향의 산성들이 횡렬을 이루고 있으며, 신라는 북으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으로서의 산성들이 종렬로 배치돼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산성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국원성을 거점으로 하여 청주지역으로 진출하였으나 남성골산성 등을 일시적으로 경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5세기 후반 청주지역은 삼국의 군사력이 집중된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각기 주변에 성곽을 쌓아 방어를 굳건히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부모산성과 와우(우암)산성을 둘러보자.

부모산성은 청주시 서쪽에 위치하며 주변에 미호천 유역에 발달한 구릉과 충적평야가 넓게 펴져 있는 해발 231.7m에 위치하고 있다. 내외 겹축의 석축성으로 둘레 1,135m, 성벽 너비 6.4~7m이다. “前”자 명문이 새겨진 백제시대의 토기류와 인장와(印章瓦) 등이 출토되었고, 체성 바깥쪽으로 신라가 쌓은 것으로 보이는 보축 성벽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부모산성이 백제 웅진-사비 시기에서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청주지역에서 중추적인 기능을 수행한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백제 한성기까지 소급될지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 초축연대를 일단 백제 웅진기까지 올려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부모산성과 그 주변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 유적은 이 일대가 신석기시대부터 백제시대에 걸친 시기에 미호천과 병천천을 수계로 하는 지역에서 촌락을 형성하면서 점차 독자적인 읍락(邑落)집단을 이루다가 산성이 축성된 이후에는 백제의 지역단위 성(城)으로 편제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와우산성은 산세가 동고서저(東高西低)를 이루고 있는 청주의 진산인 와우산(우암산, 338m)의 가장 큰 계곡을 둘러쌓아 비교적 넓은 편이며 물도 풍부하다. 둘레 약 2,997m로서 포곡식산성인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제 상당현의 치소에 이어 신라 서원소경의 치소일 가능성이 함께 제기되고 있다. 산성이 축조되기 이전 청동기시대부터 백제시대와 신라영유기에 걸쳐 일정한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은 무심천 서쪽과는 달리 신라 때에는 청주지역을 통치하는 중심이었던 곳으로 짐작된다. 와우산성 일대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시기의 유물로 보아 일찍부터 재지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유신 가문 4대의 역사 발굴과 치소 찾아야

상당산성은 원래 삼국시대 토성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뒤 여러 차례 축성되었는데, 특히 조선왕조 숙종~영조 사이에 대대적인 개축이 있었다. 오늘날의 산성 모습은 대체로 그 당시에 개보수된 것이기에 다음에 따로 살펴보고자 한다.
청주지역의 관방유적은 이른 시기의 정북동토성에서부터 우암산-당산토성, 부모산성, 상당산성과 같은 삼국시대 산성이 대표적이며, 이후에도 고려 조선시대에 청주나성(羅城), 청주읍성 축성, 것대산 봉수대, 율봉역 등 매우 다양하고 특색이 있다. 특히 부모산성이나 우암산토성은 좀 더 정밀 발굴 조사함으로써 상당현 치소, 낭성과 서원경성이 어느 곳인지 청주지역의 고대사의 비밀을 풀어내야 할 것이다. 또한 삼국쟁패시기 청주지역일대에서 4대(김무력-김서현-김유신-김원술 원정)에 걸친 김유신 가문과 연관된 역사를 발굴해내는 일은 매우 흥미 있는 얘기꺼리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